`의로움 지키는 마을'서 만나는 금성대군
`의로움 지키는 마을'서 만나는 금성대군
  • 김명철 청주 현도중 교장
  • 승인 2019.05.13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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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역사기행
김명철 청주 현도중 교장
김명철 청주 현도중 교장

 

증평에서 진천으로 가는 길 행정구역상으로 진천군 초평면 용기리 입구 작은 길의 이름이 `수의로(守義路)'다. `의로움을 지킨다'는 뜻의 `지킬 수(守) 옳을 의(義)'다. 무슨 사연이 있기에 시골 마을 작은 길 이름이 이토록 거창한가? 마을 안길을 조심스럽게 들어가 본다.

놀랍게도 우리 민족이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세종대왕의 6번째 아들인 금성대군의 사당이 서 있다. 세종대왕의 8명의 아들 중 유일하게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을 반대하고 분기했던 유일한 아들이 바로 금성대군이다. 그런데 이런 한적한 시골 마을에 어떤 연유로 아버지 세종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고, 절개의 상징인 금성대군의 사당이 이곳에 있는가?

금성대군의 이름은 유(瑜)이며, 어머니는 소헌왕후 심씨이다. 세종의 여섯째 아들이며 단종의 숙부이고, 수양대군(세조)의 동생이다. 1433년(세종 15) 금성대군으로 봉해졌다. 세종이 금성대군을 특별히 총애한 내용의 기록이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1440년(세종 22년) 한때 발진과 열병으로 생명이 위독했을 때 기적적으로 그 병을 치료한 의관들과 관련자들에게 세종이 크게 상을 내린 기록도 있다. 1452년 단종이 즉위하자 형인 수양대군과 함께 사정전으로 불려가 친히 물품을 하사받으면서 좌우에서 보필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1453년 수양대군이 정권탈취의 야심을 가지고 한명회, 신숙주 등과 결탁하여 안평대군을 숙청하고 김종서 등을 제거하자, 형의 이러한 행위를 반대하고 조카인 단종을 보호하는데 앞장선다.

금성대군은 1455년(단종 3) 수양대군에 의해 모반혐의로 삭령과 광주로 유배된다. 1년 후인 1456년(세조 1)에 일어난 성삼문 등 사육신이 중심이 된 단종복위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이후 다시 유배된 영주 순흥에서 순흥부사 이보흠과 함께 또 의병을 일으켜 단종의 복위를 꾀했다. 그러나 거사를 얼마 앞두고 당시 순흥의 한 관노가 탈출해 한성으로 달려가 세조에게 `금성대군이 순흥부사 이보흠과 함께 노산군(단종)의 복위를 꾀하고 있다.'라는 보고를 올려 사사되고 말았다.

이곳 진천 수의마을에 있는 금성대군사우는 정면 6칸, 측면 1칸의 맞배집으로서 1990년 12월 14일 충북문화재자료 제10호로 지정되었다. 금성대군이 함경도 삭령으로 유배될 당시 부부인 최씨가 이곳에서 가까운 북이면의 친정으로 내려와 아들을 낳고 그 후손들이 이곳으로 들어와 마을을 일구며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 뒤 중종 때 금성대군의 증손 이의가 왕에게 청을 올려, 금성대군의 억울함을 주장하여 1519년(중종 14년)에 금성대군의 자손 3대에게 관작을 내렸다고 한다. 이후 숙종 때 금성대군의 관작이 복구되고 영조 때 신분이 회복되어 정민(貞愍)이라는 시호가 내려지게 되었다.

현재도 금성대군을 기리는 여러 사적지에서 그에게 사사 명령이 내려진 음력 10월 21일을 기일로 보고, 봉사손들이 중심이 되어 제사를 지내고 있다. 세종의 많은 아들은 권력자 세조의 편에 가담하여 출세와 현실의 권세를 누리며 살다가 죽었다. 그러나 금성대군은 강직한 성품과 충성심으로 아버지 세종과 큰형 문종의 뜻을 받들어 조카인 단종을 목숨을 걸고 보호하려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이다.

강렬한 태양이 뜨거운 여름을 재촉하는 초여름. 의로움(義)을 지키는(守) 수의마을 금성대군 사당 앞에 서면, 자신을 누구보다 사랑했던 아버지와 형의 믿음과 사랑에 보답하고, 명분과 절개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생명도 아낌없이 던졌던 금성대군의 절개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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