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 저 꽃이 불편하다
오월, 저 꽃이 불편하다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19.05.07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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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날씨는 모처럼 서럽도록 맑았다. 미세먼지 걱정 없이 오월의 한낮을 보낼 수 있음이 오히려 신기할 따름이다. 하염없이 날리는 것은 생명을 이어가려는 소나무 꽃가루.

`송홧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 집/ 눈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 대이고/ 엿듣고 있다' <박목월. 윤사월> 한가로이 시를 읊고 있는 짧은 시간 앞에 불쑥 꽃집 공간 앞 형형색색 넓게 펼쳐진 카네이션이 눈부시다.

메이데이로 시작된 오월은 기념하거나 기억해야 할 일이 참 많은 계절이다.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고 먼 산을 바라보라. 어린애의 웃음같이 깨끗하고 명랑한 5월의 하늘, 나날이 푸르러 가는 이 산, 저 산, 나날이 새로운 경이(驚異)를 가져오는 이 언덕 저 언덕, 그리고 하늘을 달리고 녹음을 스쳐 오는 맑고 향기로운 바람, 우리가 비록 빈한하여 가진 것이 없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러한 때 모든 것을 가진 듯하고, 우리의 마음이 비록 가난하여 바라는 바 기대하는 바가 없다 할지라도 하늘을 달리고 녹음을 스쳐오는 바람은 다음 순간에라도 모든 것을 가져올 듯하지 아니한가.' <이양하. 신록예찬. 부분> 수필가 이양하를 추억하지 않더라도, 눈앞에 펼쳐진 연둣빛 산하는 충분히 싱그러운데, 핏빛을 지우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오월은 여태 서럽다.

“5일 어린이날, 집에 어린이 없고, 8일 어버이날, 양가 모두 돌아가셨고, 15일 스승의 날, 학창시절 지도교수님께선 미국 이민 가셨고...” 살짝 훔쳐 본 충북도립대 조동욱교수의 페이스북 서러움이 온통 나에게로 전이되면서 쓸쓸함이 더해진다.

기념일을 정해 특정 사안에 대해 기념하는 것은 역사적 가치를 부여하는 일이다. 기념일에 해당되는 그 날 그 날이 당대의 서사에 머무르지 않도록 특정하는 것이고, 역사적으로 충분히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일정 부분 강제하는 것이다.

노동절은 인간 노동의 존엄한 가치를 되새기며 노동자의 권익을 존중해야 함을 이 날 하루만큼은 각성하자는 의미가 있다. 어린이날은 그날만 어린이를 위해 헌신하고 보살펴야 한다는 시간적 보조 장치가 아니라, 어쩌면 우리 모두의 미래를 위한 희망의 메시지에 방점을 찍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지극히 어른의 편의에 해당한다.

아! 그리고 어버이날. 천륜인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에서 인륜에 해당하는 효도에 대한 가치를 새삼 돌아봐야 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이 날. 부끄럽지 않고 떳떳하며 당당한 이 땅의 자식들은 얼마나 남아 있을까. 세월은 마냥 기다려주지 않고, 인명 역시 언젠가는 한계에 도달할 수밖에 없는 유한의 섭리 앞에 어버이날을 인위적 강제성의 일환쯤으로 여기는 세태가 심상치 않다. 나를 비롯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런 기념일적 풍습에서 자신만은 예외일 것이라 여기고 싶은 충동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 자의적인 자위가 몹시 불편한 일임을 어찌 모르겠는가.

스승에 대한 의미는 갈수록 옅어지고 있다.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을 통해서 자아가 성숙하고 삶의 지혜를 깨닫게 되는, 즉 생명의 부모와 지식의 부모라는 등가적 존경과 섬김의 대상에서 스승의 자리가 위태로워지는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부모는 물론 어린이조차 그 기념일을 표현하는 수단이 돈 봉투로 일관되게 선호되는 세상, 스승에 대한 감사는 사회적 모멸감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싱그러운 오월의 햇빛을 반사시키며 찬란하게 빛나는 꽃집의 상품, 카네이션을 흔하게 발견하는 오월이 참 불편하다.

`모를 일이다 내 눈앞에 환하게 피어나는/ 저 꽃덩어리/ 바로 보지 못하고 고개 돌리는 거/ 불붙듯 피어나/ 속속잎까지 벌어지는 저것 앞에서 헐떡이다/ 몸뚱어리가 시체처럼 굳어지는 거/ 그거 (중략) 내 끝내 혼자 살려는 이유/ 네 곁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 <박영근. 저 꽃이 불편하다> 오월은 속죄의 계절. 그 속죄의 마음에 항상 죄를 사하여 주는 어머니의 불편함. 카네이션 꽃, 그 빛과 향기가 처량하게 산란되는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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