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 꽃
가시 꽃
  • 김경순 수필가
  • 승인 2019.05.07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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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김경순 수필가
김경순 수필가

 

그때는 왜 그리도 배가 고팠는지…. 아마도 결핍에서 오는 허기였을 것이다. 내가 겨우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무렵이었지 싶다. 학교에서 파하고 돌아오면 배가 고파 부엌 시렁을 뒤져 봐도 집에는 언제나 딱딱하게 굳어 버린 보리밥뿐이었다. 그것은 밥이라기보다는 아침에 엄마가 보리쌀만을 후루룩 한번 삶아 낸 것이라 밥이라 할 수도 없었다. 그래도 고추장을 넣어 비비면 얼마나 꿀맛인지 허겁지겁 먹곤 했다.

우리 아버지는 허랑한 사람이었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로 인해 언제나 몸도 마음도 편할 날이 없었다. 그래서 쌀밥을 먹는 것은 아주 특별한 날뿐이었다. 아마도 어머니에게 우리 4남매는 밥을 달라고 시끄럽게 울어대는 새끼제비였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모든 부분에서 우리 형제들은 경쟁했던 것 같다. 수제비국과 쌀이 섞인 보리밥 앞에서 우리는 서로의 그릇을 탐하고 비교하며 투덜거리는 날이 허다했다. 옷이나 가방, 신발은 계집과 사내아이가 따로 없어 오빠의 옷이 작아지면 나는 그것을 물려 입어야만 했고, 양말은 먼저 신는 사람이 임자였다.

`즐거운 나의 집'을 지은 미국의 극작가이자 배우인 존 하워드 페인에게 가정이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그의 상상속의 집은 꽃이 피고 새가 우는 낙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고 한다. 그가 이 노래를 지은 것은 프랑스 파리에서 동전 한 푼 없는 처량한 신세였을 때였다. 그는 평생 결혼을 하지 않고 집도 없이 길거리를 떠돌다 길거리에서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새가 울고 꽃이 피는 동산에는 뱀도 살고 뾰족한 가시를 무기 삼아 살아가는 나무들도 있다는 것을 그는 알았을까. 내 어릴 적 우리 집은 웃음보다는 하루가 멀게 경쟁하고 다투는 4남매로 인해 엄마의 한숨소리가 가뭇없게 흐르는 날이 많았다. 아버지에게 집이란 어쩌다 들리는 간이역쯤이었다. 때문에 어머니는 어디 의지할 데도 없이 자식만을 보고 살아야 했고, 우리들 또한 아버지의 빈자리는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허기였다. 그래서인지 장남이었던 큰오빠는 자신보다 위였던 언니를 비롯한 우리 형제들에게 엄한 가장 노릇을 했던 것 같다. 아버지에게보다 큰 오빠에게 꾸중을 들었던 일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을 보면 말이다.

`가정이란 원래부터 행복하고 절로 평화로운 것이 아니다. 무수한 갈등을 해결하고 서로의 욕망을 협상하고, 때로는 서로 다른 의견을 조절하는 곳이다'이 말은 소설가 김형경이 『천개의 공감』에서 피력한 말이다. 가정이란 작은 사회의 원형일 것이다. 그곳에서는 부부간의 대립과 형제들 간의 경쟁이 끊임없이 일어난다. 그러는 과정에서 가족의 구성원들은 서로에 대한 이해, 양보, 타협이라는 것을 감득하게 된다. 그래서일까. 가정은 사랑을 연마하는 곳이라는 말도 있다. 지금 내 생활을 보아도 가정은 천당과 지옥을 오가고, 보람, 즐거움이 있는가 하면 포기와 좌절과 같은 감정의 기복이 수시로 파랑처럼 몰려오곤 한다.

지금은 꽃의 계절, 머지않아 아카시아도 꽃을 피울 것이다. 가시만 가득해 피하고 싶던 그 나무에서 진한 향기를 내 품는 꽃을 피워내는 것처럼, 지금의 내 추억의 우물이 찰랑찰랑 마르지 않는 것은 힘든 시절을 함께 보듬으며 버텨낸 가족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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