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상씨의 꿈
풍상씨의 꿈
  • 강대헌 에세이스트
  • 승인 2019.03.28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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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헌의 소품문 (小品文)
강대헌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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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필의 `꿈'이란 노래를 좋아하면서도 짧은 글 하나 쓰지 못하고 미루기만 하던 제가 그만 정신이 퍼뜩 들고 말았습니다. `왜그래 풍상씨'라는 40부작 분량의 주간 드라마를 쓴 문영남 작가의 긴 호흡이 그 노래에 대한 헌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꿈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모질게도 여겨지지만, 어찌 보면 평생을 따라다니는 애인 같을 수도 있겠군요.

이름값을 제대로 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빼어난 사람들도 그렇다는 얘기를 듣겠지만, 찌질하게만 보이는 사람들도 예외는 아닐 겁니다. `풍상(風霜)씨'의 경우가 그랬죠. 세상의 고생이나 고통을 아무리 호되게 겪는다 해도 그 사람처럼 겪을 수가 있을까 싶었습니다. 콩가루 집안의 가장 노릇도 버겁기만 했던 풍상씨였는데, 그것도 모자란 듯이 큰 병에 시달리기도 했으니까요.

풍상씨 집안이 얼마나 유치찬란했는지는 풍상씨 동생들의 이름이 진상, 정상, 화상, 외상이란 것만 들어도 익히 짐작이 되고도 남을 겁니다. 한마디로 궁상(窮狀)도 그런 궁상이 없었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라는 말을 하면서 빗겨나가기만 하는 풍상씨의 못난 엄마 노양심을 보면서는 자식에 대한 본성적인 사랑인 모성애마저 상실되고 있는 이 시대의 의미를 짚어보았습니다. 하물며 다른 사람에게 측은지심(惻隱之心)이나 보호본능 같은 것을 바라다가는 뺨을 맞을지도 모를 세상인 거죠.

드라마를 소개하는 대문 사진의 풍상씨는 마치 성난 불길과 싸우다가 기진맥진해진 소방관을 연상시켰지요. 늘 똑같은 옷차림의 풍상씨는 덩치 큰 뻐꾸기들을 건사하느라 정작 자신은 돌볼 겨를조차 없는 자고새 같은 처지를 말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풍상씨가 겪어낸 갖은 풍상이 어쩌면 우리의 자화상이요, 굴곡 많은 현대사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칠복이네 슈퍼'를 꾸려나가는 칠복이 엄마 전달자의 입을 통해 터져 나오던 “지랄을 한다”라는 화법이 답답한 숨통을 터주는 감초 역할을 했지만, 드라마는 적나라한 팩트 폭격에 충실했습니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Traum a)가 그 사람의 생애를 얼마나 쥐고 흔드는지를 놓쳐서는 안 될 겁니다. 다른 사람을 자신의 감정 쓰레기통으로 삼아서는 안 될 겁니다. 내뱉은 말에 대해 “말이여? 방귀여?”라는 말을 들어서는 안 될 겁니다. “당신의 그때 그 말이 너무 아팠어요”라는 말을 들어서는 안 될 겁니다.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다가 울어버리는 사람들이 있는 세상입니다. 1994년 `서울의 달'이란 드라마의 홍식이처럼 팬티 바람으로 눈 오는 겨울밤에 뜀박질해야 하는 사람들이 사라지지 않은 세상입니다. 그야말로 불쌍한 사람들이 많은 세상입니다.

버킷리스트(Bucket list)를 적어놓았던 풍상씨의 수첩에는 `용서'라는 말도 들어가 있었죠. 누군가는 짓누르는 죄책감을 털어버려야 할 겁니다. 누군가는 기절할 만한 `깊은 진실'의 굴레를 벗어버려야 할 겁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다 말해주는 드라마는 없겠지만, 문영남 작가의 스피커 역할은 칠복이와 칠복이 엄마가 아니었을까 하는 짐작도 하게 됩니다.

제작 의도에 따르자면, 드라마는 “가족 누군가에게 미안하다고, 고맙다고 한마디 할 수 있기”를 바랐을 겁니다. “가족은 짐이 아니라 힘!”이라고 말하고 싶었을 겁니다. 손톱에 까맣게 기름때가 절어 지워지지 않았던 풍상씨의 꿈은 가족 모두가 둘러앉아 밥상을 나누는 소박한 행복이었던 같군요.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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