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생활 - 대지의 숨
일상생활 - 대지의 숨
  • 안승현 청주한국공예관 학예실장
  • 승인 2019.03.19 19: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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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알 고주알
안승현 청주한국공예관 학예실장
안승현 청주한국공예관 학예실장

 

사나워졌다가 잠잠해지고 바람이 갈피를 못 잡더니 이리저리 난동이다. 돌확의 물높이를 조금 넘은 연잎에는 살얼음이 덮였다. 종잡을 수 없는 일기에 이래저래 어수선하다. 여러 날 걸려 내놓았던 화분을 다시 집안으로 들인다. 이런 날 밖에 두었다간 얼려 죽을 만한 것들의 야간이동이다. 정리할 틈도 없이 빈공간이면 여지없이 화분이 자리한다.

다음날 파르스름한 하늘 새벽별이 햇덩이에 시간을 건넨다. 햇덩이는 어제의 난동을 따스하게 가라앉힌다. 언제 그랬나 싶은 정도의 따사로운 햇살이다. 온갖 새들이 날아들어 돌확의 고인 물에 부리를 넣는다. 한 줄로 정렬 연신 목을 젖힌다. 잦은 날갯짓 후에 숨 고르기다.

평온한 풍경이다. 어제의 가쁜 숨과는 상반되는 숨이다. 간만이다. 겨우내 약해진 식물이 얼지는 않을까 싶은 조바심이 주변 것들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숨이 가빠졌다.

새들이 숨 고르기를 하는 뜰에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는다. 어제의 변덕스런 일기에, 살얼음이 낀 표면의 흙속에서도 바소꼴 잎은 어제의 변덕스러운 일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강건한 모습이다. 여리여리한 잎인 것 같은데 잎 안쪽으로 꽃대를 올리고 있다. 화분에 키우다 버려진 히야신스, 해를 넘기면서 꽃이 작아지는 퇴화성이라는데, 지난겨울 추위를 이기고 튼실한 촉을 올렸다. 추위를 이겨낸 뿌듯함, 그러고도 남음이 커다란 덩이의 꽃대를 올리고 있다. 그러면서 자신의 꽃색을 드러내고 있다.

길가에 상처 난 한 덩이의 상사화가 해를 거듭하더니 100여 촉을 넘겼다. 상처 난 비늘이 아물고 분구하여 무더기가 되었다. 자그마한 땅이 온통 자신의 세상인 양 건강미를 자랑하고 있다. 예전 상처의 기억은 내게만 있다. 잘 자라준 상사화, 상처를 치유할 수 있도록 해주고 번식할 힘을 준 것은 무엇일까?

포기를 나누다 잘려나간 자투리, 시든 갈색 잎조차 달지 않은 작은 뿌리 하나가 들어왔다. 조심스럽게 땅을 파고 뿌리를 넣고 흙을 가지런히 한다. 혹시 살 수 있을 거야 하는 기대로 물을 준다. 하나의 작은 자투리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5월이면 두터운 줄기를 자랑하고 꽃대를 올린다. 땅 위에 뿌리를 들어내고도 추위를 이겨내는 아이리스다.

지금은 서로 어울려 왁자지껄하게 사는 식구가 되었지만, 처음에 들어온 것들은 모두 아픈 상처가 있었다. 이것들이 회복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준 건 무엇일까? 그것은 자그마한 땅이었다. 땅은 작고 볼품없는 것들의 아픔에 귀 기울였고 함께 했다.

집안에서 자란 식물과는 사뭇 다른 환경에 사는 것들이다. 작고 볼품없는 것들이 제법 자신의 영역을 만들 정도로 자랐다. 혹한의 추위도 이겨내고 해를 거듭하면서 더 멋진 모습으로 이제 뽐을 낼 정도가 되었다. 다른 것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 회복탄력성을 만들어냈다. 아버지의 뜰에 사는 것들이다.

아버지의 뜰은 대지이다. 주변의 어떤 변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고이는 우물이 있고, 많은 새들이 모이는, 사소한 것들이 들어 자리를 잡고, 촌스럽지만 많은 것이 함께 사는 터이다.

해를 거듭하면서 늘어나는 것들에 밀쳐내는 손이 없고 정담 어린 이야기와 함께 호흡하는 숨이 있을 뿐이다. 난 아직 어리석어 대지의 숨은 들을 순 없지만, 땅에서 자라는 것을 통해 볼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다.

귀 기울여 들리지 않는 숨이 보인다. 대지의 숨은 고르기 할 필요도 없이 늘 많은 것에게 귀 기울여 들어준다. 그리고 품어내어 길러낸다. 대지는 품은 것들을 통해 숨 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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