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컵과 구석기
종이컵과 구석기
  • 우종윤 한국선사문화연구원장
  • 승인 2019.03.10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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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시선-땅과 사람들
우종윤 한국선사문화연구원장
우종윤 한국선사문화연구원장

 

매장문화재조사는 일반적으로 지표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의 3단계 과정을 거쳐 진행된다. 지표조사에서 매장문화재의 존재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시굴조사를 통해 존재 여부를 확인한다. 시굴조사에서 유구 및 유물포함층 등이 확인되면 발굴조사를 통해 형성시기·유적성격·문화내용 등 역사적 실체를 규명한다.

2011년 10월. 미호천과 보강천이 합류하는 언저리의 낮은 구릉사면부를 지표 조사했다. 구릉사면 끝자락 부분은 계단식 논으로 조성돼 지형변화가 많이 이루어진 상태였다. 지표면인 논바닥에서 유물은 찾지 못했다. 논 둔덕 단면에서 갱신세 퇴적층이 확인됐다. 구석기인들이 삶을 꾸렸던 퇴적층이다.

지형환경, 갱신세 퇴적층의 존재, 오랜 경험에서 터득한 직관으로 시굴조사를 했다. 후기 구석기시대(4만~1만년 전)의 특징적인 퇴적층이 잘 보존되어 있고, 그들이 남긴 유물(석기)을 찾았다. 정밀 발굴조사로 유적의 형성시기·문화성격·제작기술 등을 밝힐 차례다. 발굴조사에는 시간과 비용, 행정조치가 동반된다.

문제가 발생했다. 구석기인들의 삶터가 확인된 이곳은 종이컵 생산공장 건립지였다. 사업자가 발굴조사 비용을 감당할 능력이 없어 사업을 포기할 처지였다. 부부가 찾아와 털어놓은 속사정을 들어보니 참으로 딱했다. 여기서 멈추자니 유적은 훼손될 테고 사업자는 매우 곤란한 처지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결단이 필요했다. 구석기인들의 삶터를 조사해 기록으로 남기기로 했다. 이를 위해 최소 비용이 필요했으나 이마저도 분납할 처지임을 호소했다. 고고학조사 30여년 만에 처음 겪는 일이다. 구석기인들의 삶의 역사를 밝혀보고자 하는 연구자의 순수한 사명감으로 조사했다. 조사와 연구는 매우 힘들게 진행됐다. 2012년 6월, 이렇게 조사한 유적이 청주 석성리구석기유적이다. 미호천유역의 구석기유적들은 하천 가까이 분포하지 않고 하천주변에 발달한 구릉사면부 또는 구릉사면부 끝자락의 평탄면에 분포한 입지적 특징이 있는데 석성리유적도 같은 입지에 존재한다. 미호천유역 구석기유적들의 입지환경의 특징이다. 이는 미호천유역의 주변지형이 100m 이내의 낮은 구릉지대이고 구릉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어 구석기인들이 이동이나 삶을 꾸리기에 유리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천의 영향을 덜 받을 수 있는 구릉사면 끝자락을 거점으로 삶을 꾸려갔음을 알 수 있다.

발굴결과 석성리유적은 연대측정값과 석기제작수법, 석기구성 등으로 볼 때 약 3만년 전 구석기인들이 처음 삶의 터전으로 삼았고(3문화층), 이후에도 주기적으로 찾아와 이곳에서 살았음을 알 수 있었다(1,2문화층). 후기 구석기시대 이른 시기부터 늦은 시기까지 구석기인들이 삶을 꾸렸던 곳이다. 이곳에서 출토된 석기는 1,382점이며 이중 부합유물이 46개체 132점이다. 부합유물은 `서로 맞대어 붙임'이라는 명사 `부합(附合)'과 `선대의 인류가 후대에 남긴 물건'이라는 `유물(遺物)'의 합성어다. 즉, 구석기인들이 석기를 제작하는 과정에 떼어진 돌조각들이 서로 맞붙는 것으로, 석기제작행위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된다. 부합유물 간의 평균거릿값은 최소 0.62m, 최대 2.18m 떨어져 있어, 석기제작행위가 이루어진 공간은 2m이내 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공간을 석기제작소라 한다. 석성리유적의 석기구성은 석기제작관련 유물과 도구의 비율이 92.1:7.9%로 석기제작관련 유물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아, 이곳에서 석기제작행위가 활발히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도구구성은 긁개·밀개·뚜르개 등이 높은 비율을 보여 석성리유적에서 살았던 구석기인들은 활발한 도구제작과 함께 가죽, 뼈 등을 다루며 비교적 긴 기간에 머물며 생활한 삶터로서의 성격을 보여준다. 돌은 어디서나 오랜 시간을 이겨내는 인류의 기록을 위한 소재가 되었다. 종이컵 공장터에서 시간을 이겨낸 후기 구석기인들 삶의 기록을 돌에서 찾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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