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덕 위의 집- 두루봉 15굴 집자리
언덕 위의 집- 두루봉 15굴 집자리
  • 우종윤 한국선사문화연구원장
  • 승인 2019.02.24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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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시선- 땅과 사람들
우종윤 한국선사문화연구원장
우종윤 한국선사문화연구원장

 

바위를 뚫는 요란한 기계소리, 돌을 깨는 묵직한 쇠망치 소리, 요란한 사이렌 소리, 굉음과 땅을 흔드는 폭발음, 수십미터 공중을 날아 흩어지는 무수한 돌조각, 뿌연 먼지가 걷히고 드러난 원형을 잃어가는 모습. 석회암 채취를 위한 발파작업의 과정에서 나타난 현상들이다.

1970년대 후반에 이런 일들이 매일 반복되어 일어났다. 청주 두루봉동굴 유적지에서 이다. 그로부터 40여 년이 지난 현재의 두루봉유적은 전혀 딴 모습이다. 2걸, 9굴, 15굴, 새굴, 처녀굴, 흥수굴 등 구석기시대 옛 사람들이 남긴 삶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개발로 중요한 고고학 자원이 무참하게 파괴된 결과이다. 이로 인해 미래에는 두루봉에서 우리의 과거 모습을 알아낼 기회 자체가 없어졌으니 매우 안타까울 뿐이다.

1978년 9월. 두루봉 남향사면에 발파로 어지럽게 쌓인 돌조각들을 치우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늦여름 따가운 햇볕에서의 작업은 고고학 발굴이 아니라 힘든 노동의 연속이었다. 흩어진 돌조각들을 걷어내니 드러낸 석회암 바위가 감싼 듯 솟아있고, 바람을 막아주어 아늑함을 준다. 이곳이 두루봉 구석기인들의 삶의 공간이었던 15굴 집자리이다. 두루봉 정상부 가까이의 석회암 바위로 둘러싸인 남쪽 비탈면에 자리한 집자리는 앞쪽이 긴 골짜기가 펼쳐져 트여 있고, 뒤쪽은 능선이 이어져 있어 조망이 좋은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다. 두루봉 구석기인들은 햇볕이 잘 들고 사냥 대상물인 짐승의 움직임을 잘 관찰할 수 있는 곳을 삶의 터로 선택하였던 것이다. 전망 좋은 언덕 위의 집인 셈이다.

집자리는 자연상태의 석회암 바위 4개를 이용하고, 길죽한 형태의 석회암 막돌(22~55cm)을 서로 잇대어 눕히거나 세워서 담돌의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집자리의 평면형태는 긴 네모꼴로 동-서 4.5m, 남-북 2.2m이며 면적은 약 9.6㎡이다. 집 안에는 2개의 화덕자리가 설치되어 있다. 출입구 바로 안쪽에 작은 석회석 막돌을 타원형태(55×35cm)로 돌려놓아 만든 1호 화덕자리, 집안 북서쪽에 작은 석회석을 깔아 만든 부석식 형태의 타원형(55×40cm)인 2호 화덕자리가 있다. 1호 화덕자리에는 뜸숯과 불탄 재가 남아 있었고, 2호 화덕자리 둘레에서는 긁개, 자르게 등의 연모가 집중 출토되어 이곳을 중심으로 사냥한 짐승의 도살과 조리행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화덕자리는 공간배치와 구조상의 특징으로 보아 난방중심과 취사중심의 서로 다른 기능을 가진 것으로 판단된다.

15굴 집은 중심기둥 없이 일렬로 배치된 담돌과 자연상태의 석회암 바위를 이용하여 지은 집으로 추정되며 2~3명 정도가 살았던 것으로 해석된다. 이 집은 입지, 규모, 구조 등으로 볼 때 당시 사람들의 주된 식량원이었던 짐승사냥을 위해 사냥시기에 맞춰 계절적으로 와서 살았던 사냥용주거(Hunting Camp)로 짐작된다. 이는 두루봉 2굴에서 잡힌 사슴의 시기를 분석한 결과 가장 많은 사슴이 잡힌 것이 9,10월로 밝혀져 이 시기에 사냥횟수나 집단 활동이 활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사냥 계절에 15굴 집자리가 일시적인 생활거주공간으로 활용되었을 것이다.

집자리는 사람이 인위적인 공간을 만들어 삶을 꾸려가던 곳이다. 인류 최초의 집자리는 약 180만년 전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가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집자리로 아프리카 올드바이 유적에서 찾아졌다. 약 80만년 전부터 인류는 불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사회조직 구성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집을 짓고 불을 사용한 고고학적 증거는 고 인류들의 협력이 당시에도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잘 보여주며, 새로운 환경적응에 뛰어난 지혜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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