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불인(天地不仁)
천지불인(天地不仁)
  • 방석영 명리학자
  • 승인 2019.02.21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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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 論
방석영 명리학자
방석영 명리학자

 

태양의 황경이 330도에 위치함에 따라 대동강이 풀리기 시작한다는 우수(雨水)가 지났다. 금년은 `눈이 녹아서 비가 된다'는 우수와 정월 대보름이 지난 19일로 겹쳤다. 그래선지 그 어느 해 보다도 새봄에 대한 희망이 보름달처럼 더욱더 크고 밝다. 밝고 환하고 따듯한 희망의 빛에 온몸을 내맡기니, 돌연 정치-경제 등의 이런저런 현실적 문제들이 툭 떨어져 나가고, 하늘과 땅만큼 크고 넓으면서 시작도 끝도 없는 무시무종(無始無終)의 마음자리가 뚜렷해진다. 문득 시간과 공간이 사라짐으로써 저절로 본 마음자리가 밝아진 것이다.

시공(時空)이 사라졌으니 시공을 벗어난 `나'도 없고, 없다고 할 것도 없음은 당연하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니 공(空)이고 무극(無極)이며 무념무상(無念無想)이고 `심령이 가난한 자'일 뿐, 넉넉하다는 느낌마저 초극했으니 한없는 지복만이 홀로 빛날 뿐이다. 이와 같은 경지를 노자는 천지불인(天地不仁) 및 성인불인(聖人不仁)이란 구절로 설파했다. `하늘과 땅 및 성인은 어질지 않다'또는 `하늘과 땅 및 성인은 어짊조차 없다'는 의미다. 그렇다고 천지불인 및 성인불인이 `하늘과 땅 및 성인이 아주 못되고 나쁜 존재'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하늘과 땅 및 성인은 어질지도 않고 못되지도 않으며, 어짊조차 없고 못됨조차 없음을 강조한 말일 뿐이다. 이는 지공무사한 마음에서, 자기 자신의 이득을 위한 어떤 의도도 없이 매 순간을 물처럼 흐르는 무위자연(無爲自然), 즉 대소유무(大小有無) 득실시비(得失是非) 등의 양변을 여읜 `중도(中道) 무아(無我)' 및 `심령이 가난한 자'를 드러낸 말이다. 공자의 군자불기(君子不器)와도 일맥상통하는 가르침이다. 군자는 정형화된 틀인 그릇이 아니라는 것이 군자불기다. `나는 이러저러하다'는 아상(我相)이 없다는 의미다. 요즘의 표현으로는 자신만을 위해 뭔가를 고집하고 주장하는 그 어떤 틀도 없는 `NO-FRAM E'이다.

장자는 `제물론'에서 최고의 큰 사랑인 `인(仁)은 어짊조차도 내세우지 않는다'고 강조한 바 있다. 순자는 `천론(天論)'을 통해 `사람이 추위를 싫어한다고 해서 하늘이 겨울을 거둬 가는 법은 결코 없다'고 설파한 바 있다. 장자와 순자의 이와 같은 말들도 노자의 천지불인과 다르지 않다. 결국 “공(空), 무극(無極), 무념무상(無念無想), 심령이 가난한 자” 등이 다 한통속이다. 천지불인을 이해하기 쉽도록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하늘은 기도하지 않는 도둑놈이라고 해서 햇빛을 차단하고, 기도하는 성직자라고 해서 햇빛을 더 비춰주는 법은 없다는 말이다. 오직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기 때문이다.

꽃피고 새우는 춘삼월이 열흘도 남지 않았다. 이제 크게 기지개를 켜고 하늘과 땅 같은 담연한 마음으로, 우리 모두 다 함께 희망찬 새봄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나갈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 온갖 종교와 교파 및 사상과 주의 주장의 벽들을 지금 즉시 다 허물고, 생명체 본연의 순수한 본마음 자리로 돌아가, 서로서로 손을 잡고 하늘 높이 훨훨 날아오를 수 있기를 서원한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독자들의 찬란한 봄맞이를 위해, 선친(先親)께서 연필을 꼭 쥔 필자의 고사리 같은 어린 손을 감싸 쥔 채, 함께 써 주시던 명심보감의 시 한 구절을 소개한다. “花開不擇貧家地(화개불택빈가지) 月照山河到處明(월조산하도처명), 꽃은 가난한 집 땅이라고 해서 가려 피지 않고, 달은 산과 강 모든 곳을 두루두루 밝게 비추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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