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내린 뒤
눈 내린 뒤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 승인 2019.01.07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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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 교수의 한시 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겨울이면 흔한 것이 눈이지만, 그 눈 때문에 사람들은 겨울을 매력적으로 느끼게 된다. 눈이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매력은 다양하겠지만, 그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격리감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서 혼자 떨어져 있는 것을 두려워할 수도 있지만, 간혹 홀로 떨어져 있는 것이 요긴할 때도 있다. 그런데 똑같은 공간에 있다 하더라도, 다른 때 같으면 느끼지 못할 격리감을 눈이 오면 느끼게 되는 것은 무슨 연유에서일까?

조선(朝鮮)의 시인 이항복(李恒福)은 눈이 선사한 격리감을 만끽한 주인공이었다.

눈 내린 뒤(雪後)

雪後山扉晩不開(설후산비만불개) 눈 내린 뒤 산 사립문은 해지도록 닫혀 있고
溪橋日午少人來(계교일오소인래) 시냇물 위 다리엔 한낮에도 오는 사람 적네
釦爐伏火騰騰煖(구로복화등등난) 화로 속 불 활활 피어나 뜨거우니
茅栗如拳手自煨(모율여권수자외) 주먹만한 산 밤을 불 속에 묻어 구워 먹네

눈이 얼마나 내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상당히 긴 시간 동안 제법 많은 양의 눈이 내렸음은 분명하다. 눈이 다 내리고 난 뒤, 시인에게 찾아온 느낌은 아마도 세상으로부터의 격리감인 듯하다.

그렇지 않아도 산속인지라, 찾아오는 사람이 드물었지만, 눈이 내리고 나니 산속 집은 아예 찾는 사람이 없다. 그래서 해가 다 지도록 사립문도 열지 않고 있는 것이다. 격리된 것은 시인의 집만이 아니다. 시인의 집 근처 계곡의 다리에도 한낮임에도 지나는 사람이 거의 없을 지경이었다.

사람들은 격리감을 느낄 때 불안감과 두려움이 찾아오기 쉽지만, 시인은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격리감에서 안도감과 해방감을 만끽한다. 세상과 격리된 시인의 유일한 벗은 방 안의 화로이다.

단 하나의 벗이지만 따뜻하기로는 일당백이고도 남는다. 평소에도 겨울이면 방에 피워 놓았을 화로겠지만, 이날따라 화로가 시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대설이 만들어 준 격리감 때문이다.

화로에 확 끌린 시인은 마치 동심의 시절로 돌아가기라도 한 듯, 사라진 줄 알았던 장난기가 발동하였다. 은근하게 잿속에 숨어 있던 불을 인두로 들추어 내니 불길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고, 뜨거운 열기가 방안에 가득하였다.

이에 시인은 고이 간직해 놓았던 주먹만 한 알밤을 화롯불 위에 올려서 구워 먹기에 이른다. 참으로 따뜻한 장면이자 순진무구한 동심의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눈이 많이 내린 겨울은 생필품 조달에 문제가 생길 만큼 불편하기 쉽다. 그러나 뒤집어 보면, 눈이 만들어 준 장막 속에서 자신만의 은밀한 일탈을 맛보는 즐거움을 맛볼 수도 있으니 여간 좋은 일이 아니다. 세상 사는 이치는 다 이런 것이다.

/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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