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내린 집
눈 내린 집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 승인 2018.12.10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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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 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사람들은 흔히 눈을 겨울의 진객(珍客)이라고 부른다. 청하지도 않았건만, 제 발로 찾아온 보배로운 손님이 진객일 터인데, 눈이라는 겨울 진객은 여니 진객과는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다.

보배라고 하면 보통 희소성을 지니고 있지만, 눈은 그렇지 않다. 눈은 한 번 내렸다 하면 온 세상을 뒤덮고 마니, 드물기는커녕 흔해도 너무 흔하다.

세상에 흔하면서 보배로 취급받는 것은 눈이 유일할 것이다. 조선(朝鮮)의 시인 전기(田琦)는 눈 덕분에 집 안에서 평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의 세상을 경험하였다.

눈 내린 집(雪屋)

門外屐痕過訪疎(문외극흔과방소) 문밖 신발자국 난 걸 보니 찾은 이 드물고
半庭積雪映窓虛(반정적설영창허) 반쪽 뜰 쌓인 눈이 텅 빈 창을 비추네
土爐火冷黃昏近(토로화냉황혼근) 질화로 불은 꺼지고, 저녁이 가까운데
猶自床頭勘古書(유자상두감고서) 여전히 책상에 앉아 옛 책을 뒤적이네

시인은 대문은커녕 방문조차도 나서지 않은 채 방 안에서 온 하루를 보내고 있다. 몸이 아프거나 게을러서가 아니다. 눈이 많이 내린 것 말고는 다른 이유를 찾기 어렵다.

눈으로 인해 세상은 방 밖과 방 안으로 극명하게 나뉘었다. 이 두 공간은 마치 상호 왕래가 불가능한 것으로 시인에게 인식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시인은 방에서 밖의 모습을 육안을 통해 접한다. 먼저 눈을 멀리 돌려 대문 밖을 내다본다. 보이는 것은 눈뿐이다. 간혹 나막신 자국이 보이긴 하지만 무시해도 좋을 정도다. 집 앞을 지나간 사람도, 시인을 찾아온 사람도 거의 없었다는 뜻이다.

다음으로 시인의 시선은 가까운 마당으로 향한다. 마당에는 눈이 잔뜩 쌓여 있어서 마당의 절반은 눈이 다 차지하고 있을 정도였다. 이렇게 쌓인 눈이 대낮임에도 밝게 빛을 발하여 시인의 텅 빈 창을 비추고 있었으니, 그 반짝이는 모습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간다.

시인이 내다본 방 밖의 세상은 온통 눈이고, 인적이라곤 찾을 수 없는 적막함을 띠고 있는 공간이다. 마당에 쌓인 눈이 발하는 빛의 동선을 따라 시인의 시선은 자연스레 방 안으로 옮겨온다. 아침에 지핀 질화로의 불은 어느새 차가운 재로 바뀌어 있었고, 저녁 해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다.

하루의 낮 시간을 꼬박 방 안에서 옛 책을 뒤적이며 지낸 시인의 모습에서 여유와 관조가 느껴진다. 눈이 온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참으로 다양하다. 인간의 희로애락이 그대로 적용되어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눈이 만들어주는 고립감, 여기에서 느껴지는 자유로움 같은 것이 인생을 위로하고 풍요롭게 한다는 사실이다.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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