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손을 맞잡고 북을 향해 조아리다
두 손을 맞잡고 북을 향해 조아리다
  • 강민식 청주백제유물전시관 학예실장
  • 승인 2018.12.02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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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시선-땅과 사람들
강민식  청주백제유물전시관 학예실장
강민식 청주백제유물전시관 학예실장

 

우암은 그 스스로 청주, 문의 사람이라 하였으니 여러 곳에 글을 남겼다. 무덤 앞에 세운 비문을 제외하고도 향교를 비롯한 여러 관아 건물에 필적이 남아있다.

1663년 향교 명륜당 중수기가 처음 보인다. 이때는 스승 김장생(長生, 1548~1631)의 유허가 있던 논산 강경에 머물던 때이다. 옛 여산(礪山) 황산(黃山)으로 이곳에 머물며 스승을 모신 죽림서원(竹林書院)이 서액을 받은 해가 1665년이다. 스승을 기리면서도 고향 청주의 요청에 부응했던 것이다.

우암은 이후 60~80세 때인 1666년에서 1686년까지 청주 화양동에 머물렀다. 이때 청주 일대에 가장 많은 글을 남겼으니, 기록에 남은 관아 건물의 중건기와 기문이 그것이다. 1666년 근민헌(近民軒)과 청연당(淸燕堂)의 기문, 1667년 공북루와 망선루의 기문(記文), 1670년 청천사창(靑川社倉) 기문, 1672년 활 쏘던 정자 거입정(去入亭) 기문 등이 남아있다. 글 말미에 고을에 사는 백성 모모라 하였으니 그 뜻을 알겠다. 또한 1673년 신항서원 중수기와 1685년 신항서원 묘정비는 이곳 서원을 서인, 노론 중심으로 바꾸어가던 노력이었음은 이미 살펴본 바 있다.

그리고 이후 회덕 남간(南澗), 혹은 흥농(興農)에 머물며 여생을 지냈으니, 지금은 우암사적공원으로 유명하다. 여기서도 1687년 경한당(景韓堂) 기문과 반시당(反始堂) 중수기, 1688년 통군루(統軍樓) 기문을 지으며 고을 사람의 역할을 다했다.

전국 각처에 남긴 기문만 188편이니, 그다지 많다고 할 수 없지만 그가 이곳 청주에 대한 애착은 글 속에 오롯이 남아있다. 물론 망선루의 편액을 고쳐 쓴 한명회에 대해서는 `이 고을의 큰 벼슬아치인데 그 성명을 밝힐 필요가 없다고 하여 그다지 좋지 않은 감정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이 중 1667년 지은 공북루 기문에서는 여러 회한을 남기고 있는데, 이 누는 고려 말 공민왕과도 관련 있다. 공북루(拱北樓)란 두 손을 맞잡고 북쪽을 향해 조아린다는 뜻인데, 왕이 오르면 중국에 대한 사대요, 신하는 임금에 대한 충성을 뜻한다. 상당산성 가장 높은 곳에 있던 공북정도 마찬가지이다.

공북루는 대교천, 무심천변 풍광을 즐기던 곳인데, 조선 후기까지 남아있었다. 공북루는 북쪽 3리에 있었다. 옛 무심천이 지금의 우암초등학교 앞에서 북서쪽 향군로를 따라 흘렀으니, 대략 그 언저리에 있었을 것이다.

공북루에 관한 자세한 기록은 고려 말 1362년 공민왕이 공북루에 올라 신하들에게 짓게 한 시들이다. 왕은 홍건적의 침입을 피해 충주→ 안동→ 상주를 거쳐 청주에 164일을 머물렀다. 이해 9월 원나라에 두 차례 사신을 보내 새해와 황태자의 생일을 축하했다. 이어 원 황제에게 글을 올리는 의식까지 치렀다.

그리고 공북루에 올라 신하들에게 시를 짓게 하였는데, 응제시 26편이 지금도 전한다. 이 누각에 임금이 올랐으니 당시 원나라에 대한 충성 맹세였다. 이미 상주에서 반원정책을 폐기하고 원간섭기의 관제로 되돌아간 일이 있으니, 두 차례의 홍건적 침입을 맞아 반원운동이 위기를 맞고 또 원에서 왕을 폐위하려는 시도에 대응한 것이다.

그런데 공민왕이 따라 짓게 한 권한공(權漢功)의 시는 단지 서정적인 내용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권한공의 시를 따라 원에 대한 충성을 보이려 하였으니 그 배경이 궁금하다. 권한공은 바로 친원세력이며, 이때도 반란에 개입하여 홍주로 유배를 떠나던 차였다. 유배지 홍주에서의 전횡도 만만치 않았으니, <고려사> 반역 열전에 실린 이유를 알겠다.

단지 실패한 것으로만 알려진 공민왕의 반원정책이 실제 다양한 굴곡을 거쳤고, 그 현장이 바로 청주 공북루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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