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독서
어머니의 독서
  • 임성재 칼럼니스트
  • 승인 2018.11.29 20:1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주말논단
임성재 칼럼니스트
임성재 칼럼니스트

 

주말에 어머니에게 가져다 드릴 책을 고르고 있다. 10여권의 후보 중에 몽양 여운형 선생의 일대기를 그린 `혈농어수(血濃於水)'가 마음을 끈다. 책의 글자도 비교적 크고, 유독 우리나라의 역사와 현대사에 대해 관심이 많은 어머니가 좋아하실 것 같다.

내 기억으로 어머니가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은 거의 60세가 되어서부터였다. 어머니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19살에 아버지와 결혼하셨다. 아버지가 교직에 계셨지만 집안이 워낙 가난하여 어머니의 고생이 많으셨다. 자식 셋을 다 대학까지 가르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억척스런 생활력 때문이었다고 아버지는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어머니는 세 자식을 다 결혼시키고, 아버지가 교직에서 퇴직하시자 그때부터 자신의 삶을 가꾸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평생 해보고 싶었던 일에 도전했다.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고,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테니스도 배웠다. 치매예방에 좋다며 고스톱도 배워 열심히 치러 다니셨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집에 오신 어머니가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을 보면서 `너는 책을 많이 읽어서 좋겠다'고 말씀 하셨다. 그래서 그때 읽고 있던 조정래 선생의 `태백산맥'을 설명해 드리고 읽기를 권해 드렸다. 그랬더니 며칠 밤을 새우며 전집 10권을 독파해냈고, 그 이후로 책읽기의 즐거움에 푹 빠지셨다. 그때부터 어머니가 읽으실 책을 골라 드리는 일은 나의 의무이자 큰 즐거움이 되었다.

처음에는 어머니의 독서 취향에 맞게 책을 골라 드리는 일이 쉽지 않았다. 보통 한 달 동안 읽을 서너 권의 책을 가져다 드리는데 어떤 달은 일주일 만에 또는 보름 만에 다른 책을 가져오라는 연락을 받는 일이 허다했다. 내 나름대로 판단한 어머니의 지적 수준과 관심사를 고려해 읽기 쉬운 책으로만 골라 가면 꼭 그런 일이 생겼다. 그만큼 어머니를 몰랐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그래서 신중을 기해 책을 고르기 시작했고, 그런 노력이 있고 난후에야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책을 고를 수 있었다.

어머니는 역사와 관련된 책 읽기를 좋아하는데 그중에서도 우리나라의 역사, 특히 조선후기에서부터 해방전후까지의 근현대사에 관심이 많다. 그리고 그 시대의 인물을 비롯해 위인들의 삶에 대한 책도 즐겨 읽으신다. 어머니가 최근에 읽은 책은 한수산의 `군함도'와 펄벅의 `서태후'이다. 서태후를 읽고 나서는 당신이 가보았던 자금성과 이화원의 기억을 되살리며 즐거워하셨고, 군함도를 읽은 후에는 자신이 겪었던 일제의 잔혹함에 몸서리치기도 하셨다.

그러나 사실 어머니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여행이다. 자신이 모르는 어딘가를 가는 것은 어머니에게는 언제나 벅찬 감동이었다. 낯선 곳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을까, 몸이 불편한 중에도 여행을 다녀오시면 병이 다 나을 정도였다. 그래서 여유가 될 때마다 어머니에게 여행을 선물했다. 특히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일본과 중국여행을 자주 보내드렸는데, 여행을 떠나기 전에 여행지와 관련한 역사나 인물에 관한 책을 먼저 골라 드리면 그렇게 좋아하셨다.

어느덧 어머니의 나이가 여든여덟이시다. 올여름 호주를 다녀오신 이후에는 여행에 대한 자신감도 떨어졌다. 책도 오래 읽지는 못하신다. 작은 글씨에 자간이 좁은 책은 더 힘들어하신다. 그러면서도 책읽기를 포기하지는 않으신다. 경로당에 나가 친구 분들과 화투놀이하며 지내시는 것보다는 책읽기가 더 좋다고 하신다.

몸을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는 혼자사시기를 고집하면서 읽을 책이 있으면 외롭지 않다는 어머니의 노년이 부럽다. 나도 그렇게 살 수 있었으면. 어머니의 책을 고르며 문득 가져본 생각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