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지배층이 묻힌 누암리 고분
신라 지배층이 묻힌 누암리 고분
  • 우종윤 한국선사문화연구원장
  • 승인 2018.11.25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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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시선-땅과 사람들
우종윤 한국선사문화연구원장
우종윤 한국선사문화연구원장

 

역사의 흔적은 기억 속에서 지워졌다고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그 흔적은 어떤 형태로든 남아서 그때 존재하였음을 알려준다. 처음 역사가 흔적을 남긴 자리에 오랫동안 시간의 더께가 두텁게 덧쌓였어도 그 속에 남은 흔적까지 지워내지 못한다. 남한강과 달천의 합류지점 언저리인 충주 누암리 일대에 1500년 전 신라 지배층의 흔적이 잘 남아 있다. 고분의 형태로 존재하며 신라가 이 지역에 진출하였음을 알려주는 역사적 산물이기도 하다.

누암리 고분군(사적 제463호)이 처음 확인된 것은 1980년 중원문화권 설정을 위한 지표조사를 통해서이다. 이후 1989년 9월 20일 발굴조사를 위한 첫 삽을 떴다. 충북지역에서 신라시대의 대형 돌방무덤(石室墳) 조사로는 처음이다. 봉분(封墳) 높이 6m, 둘레 60m인 1호분을 첫 발굴 대상을 삼았다. 돌방(石室) 안에서 마을 사람들이 촛불을 켜 놓고 투전을 하였다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봉분에는 30년 이상 된 소나무와 갈참나무, 아카시아, 칡덩굴 등이 뒤덮여 있어 구분조차 쉽지 않았다. 당시 신라고분을 전공한 사람도 없었고, 발굴 경험이 있는 사람도 없었다. 충북 고고학의 현실이었다. 주경야독하며 발굴조사를 진행하였다. 이때의 경험이 고고학의 길을 걸어오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이후 충북대학교 박물관과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2008년까지 4회에 걸쳐 35기의 고분을 발굴하였고, 지표조사를 통해 234기의 고분이 분포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동일한 성격의 고분은 하구암리에도 469기가 분포한다. 이로 볼 때 누암리 일원에는 700기 이상의 신라고분이 밀집하여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누암리 고분군의 발굴조사 결과 고분의 매장시설은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 앞트기식돌방무덤[橫口式石室墳], 돌덧널무덤[石槨墓]이 확인되었다. 돌방의 평면형태는 네모꼴이며, 주검받침[屍床],둘레돌[護石],널길[羨道], 무덤길[墓 道], 배수구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벽은 안쪽으로 차츰 경사지게 쌓아 천정부로 이어지면서 석실 길이에 비해 낮은 궁륭상의 둥근 천장으로 올라간다. 고분의 구조적 양식으로 볼 때 신라의 전형적인 지방형 고분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돌방내부에는 모두 추가장이 확인되고 있다. 출토유물은 신라 후기양식을 대표하는 짧은굽다리 접시[短脚高杯]가 주류를 이루며, 금귀걸이, 은제 허리띠장식, 유리구슬, 덩이쇠[鐵鋌], 쇠손칼 등이 있다.

이러한 고고학 자료는 6세기 중반~7세기 초에 신라가 중원지역에 진출하였으며, 묘제로 굴식돌방무덤과 돌덧널무덤이 조영하였음을 알려준다. 이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기록과도 일치한다. 신라 진흥왕 18년(557)에 국원성이 있던 충주에 소경(小京)을 설치하고, 이듬해인 진흥왕 19년(558)에 가야에서 귀화한 사람들과 경주 왕경의 귀족과 6부호민을 이 지역에 옮겨 살게 하였다. 이는 당시 왕경인 경주 다음으로 부도(副都)로서 충주의 위상이 높아졌음을 의미한다. 이후 경덕왕 16년(757)에 중원경으로 바뀔 때까지 계속 신라의 거점도시로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굴식돌방무덤으로 대표되는 누암리 고분군은 이 시기 국원소경과 중원경을 다스리던 6~7세기 신라 지배층의 집단무덤으로 추정된다.

기록으로 남은 역사가 물질로 증명된 것이다. 잊히고 도굴되고 파괴되었어도 역사의 흔적이 그 자리에 살아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발굴된 고분 34기는 원형 복원·정비되어 있어 이곳을 지배했던 승자의 역사 흔적을 더듬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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