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고를 부탁해
장고를 부탁해
  • 하은아 충북중앙도서관 사서
  • 승인 2018.11.05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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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가 말하는 행복한 책읽기
하은아 충북중앙도서관 사서
하은아 충북중앙도서관 사서

 

유난히 더운 여름을 보냈다. 하루에도 냉장고 문을 수십 번 여닫았다. 음료수, 아이스크림, 과일 등 모든 음식은 차가워야 제 맛인 듯했다. 냉장고와 에어컨 없이는 버티기 힘든 그런 여름이었다.

엄마 집에는 그런 냉장고가 서너 개쯤 된다. 각종 양념거리가 들어 있는 냉장고, 김치만 들어 있는 냉장고, 부엌에서 주로 쓰는 냉장고, 냉동식품만 넣는 냉동고. 냉장고에서도 음식은 상하는 것이라고 몇 번을 말해도 엄마는 갖가지 음식을 쌓아둔다.

엄마에게 연락이 왔다. 냉장고가 이상하다고 한다. 누군가가 냉장고를 잘 닿지 않았는지 부엌에는 물이 한 가득이고, 냉기가 없다 했다. 언니들과 내가 출동했다. 우선 서비스센터에 전화하고 냉장고 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언제 넣었는지 모를 콩이며, 작년에 넣어 놓은 떡까지 끝도 없이 음식이 나왔다. 엄마는 버리는 것이 아까워 우리에게 “다 먹을 수 있다.”, “벌 받는다.” 잔소리를 하셨지만, 냉장고에 있던 것들의 절반 정도를 버렸다. 수리를 받고 냉장고는 여전히 쌩쌩 잘 돌아간다. 대신 엄마는 예전처럼 쌓아 놓으시지는 않는다. 아직까지는 칸칸이 넣어 드린 바구니와 서랍을 잘 이용하고 계신다.

`장고를 부탁해'(홍민정 글, 이채원 그림/머스트비, 2018)를 읽으니 더운 여름날 엄마 냉장고가 생각났다. 더 이상 제 기능을 못하는 냉장고가 마당 신세가 되고 겪는 이야기다. 푹 꺼진 소파와 반쯤 깨진 몸 거울, 냉장고는 마당에서 아직 자기들은 쓸 만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렇지만 몸거울에는 비에 젖은 할아버지의 우비가 걸쳐지고 냉장고에는 짝을 잃어버린 신발들이 들어가 있을 뿐이다. 그런 신세에도 냉장고는 자기는 이름이 있는 특별한 존재라고 한다. 할머니 손주 녀석이 지어준 `장고'라는 이름이다. 지호가 시골집에 내려오고 몰래몰래 장고의 냉동실에 이것저것 넣어 놓는다. 장고는 투덜대지만, 은근 지호에게 쓸모 있는 존재가 된 것이 즐겁기만 하다.

엄마 집 마당 구석구석에도 잡다한 것이 많다. 고물 장수에게 주어도 가져가지 않을 것 같은 그런 것들이다. 조카들이 놀던 장난감 냉장고는 아빠의 수납장이 되었고, 망가진 책장은 화분 받침이 되어 있다. 엄마 냉장고가 고장 난다면 장고처럼 마당에 있을 것 같다. 버리는 것이 익숙한 나는 엄마에게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더 이상 쓰지 않는 물건이나 먹지 않는 것들은 다 버리라고 말이다. 쓰임이 없으면 버려야 한다며, 집이 그래야 정리가 된다고 말했다.

그런 나를 본 엄마가 “엄마도 쓸 데가 없으면 버릴 거야, 다 쓰임이 있는 거야”라고 한소리 하신다. 순간 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엄마가 하신 말씀이 너무 무거워서 가슴이 먹먹했다. 난 엄마랑 고물들이 같냐며 웃으며 넘겨버렸지만 이제 엄마 물건을 정리하는 것이 조심스럽다. 엄마의 추억거리가 쌓여 엄마와 같은 그런 존재들이 되어버린 것 같다.

유쾌하게 웃으며 이 책을 끝까지 읽었다. 엄마 냉장고를 정리해준 일 하며, 냉장고를 여닫는 조카를 나무라는 엄마 모습까지 생각이 났다. 장고가 마당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찾아가듯 엄마의 오래된 물건들도 같이 떠올랐다. 엄마와 함께 오래오래 내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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