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화와 술
국화와 술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 승인 2018.10.29 20:2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태봉 교수의 한시 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가을은 인생을 관조(觀照)하기에 좋은 계절이다. 특히 늦가을 낙엽이 질 때면, 사람들은 세월의 흐름이 빠름을 절실하게 느끼게 되고 무상감에 빠지곤 한다. 사람이 살면서 무상감이 드는 것은 결코 나쁜 일이거나 피할 일이 아니다. 도리어 무상감은 인생을 멋스럽게 관조하게 만들기도 한다.

가을의 무상감을 달래며 인생을 관조할 때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국화와 술이다. 동진(東晉)의 시인 도연명(陶淵明)은 늦가을의 무상감을 과연 어떻게 삭히었을까?

술 마시며(飮酒7)

秋菊有佳色(추국유가색) 가을 국화 고운 빛 가득하니
泣露澈其英(읍로철기영) 이슬에 젖은 그 꽃망울을 따네
泛此忘憂物(범차망우물) 이것을 술 위에 띄우면
遠我遺世情(원아유세정) 속세를 멀리하려는 마음이 더욱 멀어지네
一觴雖獨進(일상수독진) 한 잔 따라 비록 홀로 마시지만
杯盡壺自傾(배진호자경) 잔이 비면 술병이 저절로 기우네
日入群動息(일입군동식) 해가 지면 뭇 생명이 움직임을 멈추고
歸鳥趨林鳴(귀조추림명) 돌아가는 새들은 숲을 향해 가며 우네
嘯傲東軒下(소오동헌하) 동쪽 난간 아래서 노래 부르다 보면
聊得此生(요부득차생) 그런대로 또 이 삶의 참뜻을 얻게 되네


가을은 쇠락의 계절이다. 꽃은 물론이고 풀이며 나뭇잎도 한때의 영화를 뒤로하고 스러져간다. 이러한 가을의 스산한 풍광 앞에 사람들은 쓸쓸해지기 십상이다. 이럴 때 오상고절(傲霜孤節)의 늠름한 모습으로 사람들을 위로하는 것이 바로 국화이지만, 시인이 국화를 아끼는 것은 서리를 이겨내는 강인한 생명력 때문이 아니고, 드러나기보다 숨어 피기를 좋아하는 은자(隱者)적 속성 때문이다.

세속의 번잡함과 번화함에서 멀리 떨어져 한적하고 깊은 곳에서 기품을 발하는 국화는 시인의 자화상이라고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여기에 남은 근심마저 잊게 해주는 술이 더해지면 그야말로 금상첨화가 아닐 수 없으리라.

절정의 자태를 뽐내는 국화 꽃잎을 술에 띄워 연거푸 거나하게 마신 시인은 속세로부터 더욱 멀어진 기분에 한껏 고무되어 있다. 그런 시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자연의 섭리대로 움직이는 자연이다. 해 지자 움직임을 멈춘 짐승들, 울며 숲 속 둥지로 돌아가는 새들로부터 인생에 대한 영감을 얻고 기뻐하는 시인의 모습은 참으로 천진하다.

가을은 쓸쓸한 게 매력이다. 쓸쓸할 때는 쓸쓸한 것이 정상이다. 쓸쓸함을 달래는 방법을 나름대로 가지고 있다면, 쓸쓸함은 인생의 맛을 한 층 깊이 있게 해줄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국화 꽃잎을 술에 띄워 마신 도연명은 가을의 쓸쓸함이 결코 괴롭지만은 않았으리라.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