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 대한 짧은 생각
영화에 대한 짧은 생각
  • 임성재 칼럼니스트
  • 승인 2018.10.18 20:2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주말논단
임성재 칼럼니스트
임성재 칼럼니스트

 

먼 길을 다녀온 날, 영화를 보았다. 몸이 피곤하면 잠을 잘 못자는 편이라 잠자리에서 뒤척이기보다는 영화라도 한편 보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한국영화를 골랐다. 한때는 할리우드영화에 빠져 한국영화는 아예 외면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요즈음은 할리우드영화보다 한국영화가 훨씬 재미있다. 나의 정서도 변했겠지만 한국영화도 이젠 참 잘 만든다.

내가 어릴 적에는 영화관을 극장이라고 불렀다. 전문 공연장이 없던 시절이라 극장은 영화 상영은 물론이고 클래식음악회, 가수들의 쇼와 연극, 정치연설을 비롯한 다양한 행사들이 열리는 다목적 홀이었다. 그래서 극장이라고 불렀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아직도 영화관보다는 극장이라는 표현이 더 정감이 간다.

나의 영화 편력은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버지가 영화를 무척 좋아하셨는데 꼬마들이 볼만한 영화면 형과 나를 꼭 데리고 가셨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는 당당하게 아버지 손을 잡고 공짜로 들어갔는데, 내가 학교에 들어간 후부터는 간간히 아버지와 극장 기도아저씨 사이에 `표를 사와라', `그냥보자'는 둥의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했었다. 사실 내 요금을 내지 않고 공짜로 보여주기 위해 벌어지는 광경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이 창피했는데 아버지는 내 생각은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공짜로 봐야하는 이유를 당당하게 주장하곤 하셨다. 간혹 아버지의 주장이 먹혀 공짜로 볼 때도 있었지만 다시 나가서 표를 사야하는 때가 많았다. 내가 좀 커서 이런 주장이 안 먹힐 때쯤엔 아버지의 코트 속에 숨어서 밀려나오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기도 했었다. 아버지는 돈을 아끼려 그러셨겠지만 나에게는 스릴이 넘치는 어린 날의 멋진 모험이었다.

이렇게 어려서부터 극장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한 버릇은 커서도 계속됐다. 아마 아버지는 이런 부작용까지는 생각을 못하셨을 것이다. 중학교에 입학한 후 나의 영화에 대한 욕구는 더 커졌다.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서 보던 영화에서 벗어나 나만의 영화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 당시 유행했던 중국무협영화와 서부영화를 개봉하는 족족 빼놓지 않고 보았다. 당시 나의 주머니 사정으로는 매주 개봉되는 영화를 돈 내고 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친구들과 극장 옆 건물의 담을 넘어 극장으로 잠입하는 길을 뚫었다. 그러다가 영화간판을 그리는 아저씨들에게 걸리면 대형 간판과 페인트 통이 즐비한 작업실에서 벌을 서며 간판장이 아저씨들의 작업을 구경하곤 했었다. 큰 간판에 붓을 몇 번 쓱쓱 옮기면 크린트 이스트우드, 제임스 코반 같은 외국 배우가 나오고, 신영균, 박노식, 김지미, 엄앵란 등 당시의 인기 배우들이 간판에서 살아났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들이 진정한 화가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돈이 없을 때는 지나간 영화를 두 편씩 상영하는 소위 삼류극장에서 도시락을 까먹으며 하루 종일 영화를 보기도 했다. 영화를 보기 위해 부모님을 속여 용돈을 타내고, 몰래 담을 넘어 학교를 빠져나가는 못된 짓도 해 보았지만 지나고 보니 그런 과정을 겪으며 어린 시절을 보내고, 사춘기의 고비를 넘기면서 삶의 낭만과 열정을 배웠는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내 인생의 길잡이였다. 영화를 통해 문학의 서사를 알게 되고, 음악과 미술에 눈을 뜨게 되었고, 세상을 이해하는 통로가 되어 내게 넓은 세계를 펼쳐 보여 주었다. 때론 영화 속 주인공의 삶에 이입 되다보면 절대로 영화 같지 않은 나의 삶이 우울할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삶에 영화가 있었기에 나는 늘 영화 같은 삶을 꿈꾸었고 삶이 아름답고 정의로워지길 소망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늘 감사한 일 가운데 하나는 누군가가 매일매일 멋진 영화를 만들고 있고, 나는 앞으로도 끊임없이 영화를 볼 것이라는 희망이다. 그런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설레는 것을 보면 어린 시절 아버지 옆자리에서 영화가 시작되길 기다릴 때의 가슴 두근거림이 아직도 내 가슴에 그대로 남아 있나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