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늦은 알밤 줍기
때늦은 알밤 줍기
  • 우래제 전 중등교사
  • 승인 2018.10.10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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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이 들려주는 과학 이야기
우래제 전 중등교사
우래제 전 중등교사

 

하늘이 높아지고 뜨거운 햇볕이 잦아들 즈음. 알싸한 밤꽃이 피고 석 달여 만에 뜨거운 태양의 열기를 받아 만들어진 밤송이는 스스로 따가운 껍질을 찢어 버리고 토실토실한 알밤을 토해내고 있다. 알밤을 줍기 알맞은 때이다. 일찍 떨어지는 올밤보다 늦게 떨어지는 늦밤이 맛이 더 좋기에 밤 줍기를 게을리하다가 추석이 코앞이 되어서야 밤 줍기에 나섰다.

밤은 우리나라에서 관혼상제의 필수품이었다. 결혼식이 끝나고 폐백을 드릴 때 아들을 많이 낳으라고 신부에게 던져 주었고 제사상에서는 대추 다음으로 오르는 과일이다. 대추는 씨가 하나라 천하에 하나뿐인 임금을 뜻하고 밤은 껍질 하나에 씨가 3개 들어 있어 3정승(좌·우·영의정)을 뜻하는 것이라고도 한다. 밤이 땅에 떨어져 싹이 나오고 꽤 자랄 때까지 어린나무에 영양을 공급하고 있는데 이 모습 때문에 근본(조상)을 잊지 않는 나무로 여겨 제상에 올린다고도 한다. 이래저래 제상에 오르는 밤. 오장환 문학관 바로 위 어느 농부가 농사짓다가 그만두고 방치된 밤나무 밭을 찾았다. 한참만에 알밤 한 가방 짊어지고 오장환 문학관을 들렀더니 미처 보지 못한 시 하나 눈에 띈다.

깔큼이밋헤빤드리/ 반드리밋헤털털이/ 털털이밋헤달콤이/ 다람쥐먹지말나고/ 깔큼이를씨Ÿm다네// 버레가드리울제는/ 밋그러지라고서요/ 빤드리를씨Ÿm다네/ 벌어지가털털이를/ 먹으면털털하다네// 사람들이먹으라고/ 달큼이를씨Ÿm다네/ 까기는서렵지만은/ 그래도맛은좃타네/ 살문밤은노인차지// 시어미몰내군밤을/ 이불속에서먹으며/ 남보기먹고싶게도/ 흥달다흥흥달고나/ 군밤은메누리차지(밤, 5학년 오장환)

이 시는 내 고장 회인 출신 오장환이 5학년 때 쓴 시이다. 보통 과일은 가장 바깥쪽에 병충해를 막는 1차 방어선으로 외과피(겉껍질), 주로 우리가 먹는 중과피, 가장 안쪽에서 씨를 보호하는 내과피(속껍질)로 싸여 있다. 밤은 특이하게 겉껍질이 가시로 변해있다. 안쪽의 밤이 여물며 네 갈래로 벌어지는데 시인은 이 가시를 깔큼이라고 표현하면서 다람쥐가 먹지 못하게 생긴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중과피에 해당하는 빤질빤질한 껍질을 빤들이라고 하면서 벌레(버레)가 미끄러지라고 싸여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또 밤 껍질 안쪽 속껍질은 떫은맛을 내는데 이를 털털이라고 하면서 벌레(벌어지)가 먹으면 털털하다고 맛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털털이(속겁질) 안쪽 달콤한 노란 밤을 사람들이 먹으라고 있는 달큼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이 밤의 씨(종자)인 것이다. 10세에 밤 열매의 구조를 시로 표현해냈으니 대단한 관찰력, 상상력, 표현력이다. 게다가 나이 많은 노인은 이가 없어 삶은 밤을 좋아하고, 궁핍한 살림에 삶은 밤 한 톨 맘 놓고 먹을 수 없는 부엌데기 며느리가 시어머니 몰래 군밤을 구워 이불 속에서 먹는 모습까지 `흥 달다 흥흥 달고나' 라고 표현하고 있으니 사소한 일상생활도 놓치지 않는 세심함을 갖추고 있다.

시인이 밤을 한두 번 보고 위와 같은 시가 지어진 것은 아닐 터. 어려서부터 밤을 따고 벌어지지 않은 밤송이도 까보고 채 벗기지 못한 속껍질의 떫은맛도 수없이 맛보았을 것이다. 아마도 시인은 초등학교를 오가며 밤나무 밑을 밤 소쿠리에 생쥐 드나들 듯했을 것이다. 아! 내가 주운 이 밤이 시인 줍던 그 밤이었을까? 여기 오장환 생가 근처의 밤나무가 그대로 오래 머물러 시인의 옛 이야기를 들려주었으면 좋겠다. 요즘 아이들은 알밤을 주워보기나 했을까? 보고 관찰하고 맛보고 체험하고 그것을 표현하는 습관을 기를 필요가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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