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가을에
이 가을에
  • 반영호 시인
  • 승인 2018.09.20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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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 論
반영호 시인
반영호 시인

 

벌초 날이다. 아침을 일찍 먹고 산소로 향했다. 자전거를 타고 농로 길을 따라 달리는 기분이 만연 상쾌하다. 100년 만의 폭염과 길고 긴 가뭄의 날들을 이겨낸 대견한 곡식들이 더욱 풍요롭게 보인다. 논둑길을 들어서면,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 만 간다.' 는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란 시가 떠오른다.

여성의 가르마는 옛날 여성들이 비녀를 꼽거나 양쪽으로 댕기를 따거나 양쪽으로 묶기 위하여 가마에서 양 눈 사이로 갈라서 뒤로 당겼기 때문에 머리를 가른다고 하여 가르마이다. 논둑길을 중심으로 양옆에 고개 숙인 벼 이삭들이 마치 팔순을 바라보는 누님의 소녀적 가르마를 탄 청순한 그때 그 모습을 보는 듯하다. 가르마를 타고 양옆으로 묶은 머리는 토끼 같아서 `토깽이'라고 놀리곤 했었다.

논둑길을 깊게 들어갈수록 통통하게 살 오른 메뚜기들이 여기저기서 어지럽게 톡톡 튄다. 선친께서는 아침 일찍 물고를 보러 나가셨다가 메뚜기를 잡아 강아지풀 꽃대에 주렁주렁 한 꿰미씩이나 꿰어 오셨고, 어머닌 이를 볶아 반찬으로 만들어 술안주로 드리곤 하셨다. 모가 어릴 때 피사리를 해도 피가 돋아나는 게 많았다. 나는 처음 피사리를 할 때 피와 벼를 구분하지 못해 멀쩡한 벼를 뽑기도 했다. 벼 이삭이 돋아나면 벼와 피가 확연히 드러나는데 씨로 영근 피는 버리지 않고 훑어다 새 먹이로 썼다.

논둑에는 쥐눈이콩이 심겨져 있다. 생김이 쥐의 눈과 비슷해 붙여졌는데 흔히 먹는 검은 콩인 서리태 보다 작고 윤기가 흐른다. 일반 콩보다 크기는 작지만 영양은 훨씬 풍부하며 노화방지 효과가 있다고 하여 예전에 많이 심었는데 요즘은 유방암 세포 전이를 억제하는 효과가 탁월하다고 한다. 지금도 궁금한 것은 왜 쥐눈이콩을 논두렁에 심는지는 알 수 없다. 크기가 작아 수확량도 적을 텐데 쥐눈이콩을 고집한 부모님이셨다.

오면서 딴전을 피운 탓에 산소에는 꼴찌로 도착했다. 세대의 예초기 소리가 골짜기에 울려 퍼지고 있었는데, 청주 대전에서 동생들과 조카들이 이미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제전과 날개만 깎고 정작 봉분은 그대로였다. 알고 보니 봉분에 옻나무가 있어 옷이 오를까 봐 다들 꺼리고 있었다. 결국, 옷 안타는 아들 몫이 되고 말았다. 아들은 오히려 기분 좋은 모습으로 벌초작업을 했다.

생전에 삭발하시던 아버지다. `아버지. 더부룩하니 답답하셨을 텐데 시원하시겠어요.' 아직 예초기 다루는 솜씨가 서툰 아들은 직접 할아버지 봉분을 깎는다는데 큰 자부심을 느끼는 것 같다. `올해는 이 손자가 직접 이발을 해 드릴게요. 할아버지 좋으시죠?' `오냐. 이제 너도 많이 컸구나. 할아버지 이발도 해주고….'작년 초에 결혼하고 겨울에 아빠가 된 아들이다. 자식을 낳더니 한껏 어른이 된 듯한 모습이 여간 대견하지 않다.

내리사랑이라고 했던가? 내가 아들을 낳았을 때보다도 아들이 낳은 손녀가 어찌 그리 예쁘고 사랑스러운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아기를 찾고, 저녁엔 웬만한 모임엔 불참하여 아기를 보러 간다. 이렇게 아침 한 시간 저녁 두 시간을 손녀와 보내는 시간이 행복에 겹다. 아들을 닮았는가 싶다가도 어찌 보면 며느리를 닮았고, 며느리를 닮았지 싶은데 다시 보면 아들을 닮았다. 그런데 또 내가 손녀를 안고 대문을 나서보면 어떤 이는 `손녀가 할아버지를 쏙 빼닮았군요?'한다.

그렇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다른 도둑질은 다 해도 씨도둑질은 못한다는 말이다. 비슷하긴 해도 피 다르고 벼 다르다. 쥐눈이콩과 서리태가 모양은 비슷해도 엄연히 다른 콩이다. “아버지 이번 추석 성묘 때는 아버지 닮은 증손녀를 꼭 데려와 보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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