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양복의 기억
첫 양복의 기억
  • 임성재 칼럼니스트
  • 승인 2018.09.13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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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논단
임성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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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나의 첫 양복이 생긴지 45년째 되는 날이다. 지금 기억으로는 양복을 갖는 것이 그렇게 절실한 소원도 아니었는데, 하고많은 날 중에 아직까지 그 날을 기억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나는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친구들과 `스트링하모니(string harmony)'라는 연주 동아리를 만들었다. 첼로를 하고 싶었지만 악기 살 돈이 없어 고등학교 밴드부에서 악기를 빌려 쓸 수 있는 콘트라베이스를 맡았다. 공부보다 악기연습에 빠져 살았다. 가을 무렵 드디어 첫 번째로 무대에 설 기회가 다가왔다. 연주복으로 양복을 입기로 했는데 양복이 없어 형 친구의 옷을 빌려 왔다. 생전 처음 양복을 입는 순간이었다. 멋진 모습을 기대하고 거울 앞에 섰으나 옷이 커서 헐렁한 부대자루를 뒤집어쓴 것 같은 모습이 마치 삐에로를 보는 것 같았다.

옷을 빌리려 다니는 모습이 안쓰러우셨는지 추석을 앞두고 어머니께서 양복을 한 벌 맞추라고 하셨다. 날아갈 듯이 기쁜 마음으로 친척 아저씨가 경영하는 양복점으로 달려갔다. 당시에는 춘추복 개념의 양복이 없었는지 아저씨는 두툼한 겨울 옷감으로 양복을 지어주셨다. 손꼽아 기다리던 양복을 찾아다가 옷장에 멋지게 걸어 놓았는데 입을 일이 없었다. 아무 때나 양복을 입고 나가기는 쑥스럽고 해서 집에서만 입고 벗기를 수십 번 되풀이 하곤 했었다.

그러다가 추석이 다가왔다. 이때다 싶어 할아버지가 계신 시골을 갈 때 양복을 차려입었다. 지금이야 한 시간 반 정도면 갈 거리지만 자가용이 없고 도로사정이 좋지 않았던 당시에는 버스를 갈아타며 비포장도로를 5시간 넘게 달려야 했다. 그렇게 할아버지를 뵙고 돌아올 때는 이것저것 바리바리 싸주신 보따리가 양손가득이었다. 그날따라 날이 포근해서인지 겨울 양복을 입고 30여분을 걷다 보니 땀이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양손에 보따리를 들었으니 옷을 벗어 들 수도 없었다. 버스정류장에서 한참을 기다린 끝에 버스가 도착했는데, 이미 버스는 발 디딜 틈도 없이 승객이 꽉 차있었다.

도저히 버스에 올라탈 엄두를 낼 수 없었다. 그런데 다음 버스 시간까지는 3시간을 기다려야 했고, 다음 버스에 승객이 많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결단을 내리셨다. `타고 가자' 그 말씀 한마디에 형과 나는 앞장서서 버스를 비집고 들어가기 시작했고, 아버지는 우리의 등을 밀며 간신히 버스에 오를 수 있었다. 어찌어찌 양손의 보따리는 짐칸에 올렸는데 몸은 꼼짝할 수가 없었다. 고개조차 돌리기 힘들었다. 온몸에서 땀이 비 오듯 쏟아지는데도 마음대로 손을 올려 땀을 훔칠 수조차 없었다.

처음 입은 양복이라 옷이 구겨질까봐 할아버지께 절을 할 때도 다리를 제대로 굽히지 않았는데 버스 안에서 양복은 처참하게 짓눌리고 뭉개지고 있었다. 버스에 올라탈 때 만해도 옷이 구겨질까봐 신경을 썼는데, 사람들 틈바구니에 꼭 끼어 땀이 줄줄 흐르게 되자 두꺼운 겨울양복이 원망스러웠다. 차라리 벗어 버리고 싶었는데 그럴 수도 없었다. 그렇게 5시간 동안 고문을 당하고 버스에서 내렸을 때 양복은 눈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구겨져 있었다.

그 양복은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할 때까지 10년도 넘는 기간 동안 나의 단벌 신사복이었다. 첫 양복이어서 그랬는지 처음 입었을 때의 쓰라린 추억이 깃들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애착을 갖고 입었던 기억이 난다. 이후에도 그렇게 애틋한 감정을 불러일으킨 옷은 없었던 것 같다.

계절이 바뀌면서 옷을 정리할 때면 항상 나의 첫 양복의 추억이 떠오른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은 아무리 좋은 옷을 입어도, 아무리 좋은 것을 가져도, 아무리 많은 부를 쌓아도 그 과정에 자신만의 이야기가 깃들어 있지 않다면 남에게는 물론 자신에게도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것처럼 나만의 진실한 이야기가 담긴 하루가 우리의 마음을 풍요롭게 하고 내일을 행복으로 가꿔주는 자양분이 될 것이다. 그런 하루하루를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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