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이별
  • 임성재 칼럼니스트
  • 승인 2018.08.23 19:3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주말논단
임성재 칼럼니스트
임성재 칼럼니스트

 

동고동락하던 애마(愛馬)와 작별했다. 처음 만났을 때 우리는 다짐했었다. 달나라에 가는 날까지 함께 하자고. 나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건만 그는 더 이상 힘들다며 그만 놓아달라고 한다. `이제 겨우 반을 넘었을 뿐이야. 조금만 더 가보자'고 사정해보았으나 그의 뜻은 완고하다. 더 이상 움직일 기력이 없다는 것이다. 나는 우리의 약속을 포기할 수 없어 백방으로 명의를 찾아보았으나 백약이 무효함을 깨닫고 그를 놓아주기로 했다.

우리가 처음 만난 것은 7년 3개월 전으로 다니던 회사를 퇴직한 직후였다. 그때 나는 함께할 친구가 필요했는데 누구를 선택해야할지 선뜻 결정하기가 어려웠다. 퇴직, 시골로의 이사 등 여러 가지 여건을 고려할 때 경제성이 최우선의 조건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꼼꼼한 관찰과 이것저것을 따져보는 검증 끝에 선택한 것이 멕시코에서 태어난 독일국적의 친구였다.

선택은 탁월했다. 적게 먹어도 많이 달리는 뛰어난 경제성에 감격하기까지 했다. 퇴직 후 시골에 집을 짓느라 하루에 100여㎣씩을 1년이 넘게 다녀도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 달리면 달릴수록 이익일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후로 나의 욕망이 미치는 곳이면 어디든지 함께 달려갔다. 지구 둘레가 4만㎣이니 우리는 그렇게 지구를 6바퀴나 돌고 돌은 셈이다. 시속 4㎣의 속도로 걷는다면 6년 8개월을 쉬지 않고 걸어야 할 거리를 함께 쏘다닌 것이다. 내 자유로움의 상징이었다. 그래도 우리가 처음에 다짐한 달나라까지 38만㎣를 가려면 아직도 지구 네 바퀴 가까이를 더 돌아야 하는데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지나고 보니 꼭 꽃길만은 아니었다. 만난 지 3년쯤 지나자 그가 아프기 시작했는데, 한번 아프면 치료비가 엄청났다. 애완동물을 데리고 동물병원에 가면 사람보다 훨씬 비싼 치료비 때문에 버려버릴까 하는 순간적인 충동이 들기도 한다. 그러다가도 재롱떠는 애완동물을 보면서 치료비의 충격을 잊는 것처럼 나의 애마도 한꺼번에 엄청난 치료비를 먹어 치울 땐 버려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많았다. 하지만 매일매일 소소하게 충족시켜주는 적게 먹고 많이 달리는 본연의 경제성을 만족시켜 주었기에 치료비의 충격에서 벗어나곤 했었다.

그런 나를 보고 누구는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지는 장사라고 비아냥거렸다. 그런 소리를 들으면 지체 없이 애마에 대한 변론에 나섰다. 하지만 꼼꼼히 적으며 수치로 따져보지 않았기에 정확한 근거를 제시하기는 어려웠지만 그 친구에 대한 애정은 변함이 없다고 항변했었다.

이런 친구와 이별이다. 그의 마지막 운명은 알지 못한다. 자신의 장기를 하나하나 떼어내 죽어가는 다른 생명을 살리고 장렬한 최후를 맞을지, 아니면 누군가의 손에 의해 치료받고 외국으로 팔려나가 다른 누군가의 애마가 될지는 모를 일이다. 하지만 나는 그를 잊지 못할 것이다. 나의 모든 족적을 낱낱이 기억하는 친구. 나의 허물을 나보다 더 잘 알면서도 끝까지 입을 다물어줄 친구. 어디에 세워놓아도 하루든 며칠이든 불평 한 마디 없이 기다려주는 친구. 나의 욕심과 허영을 가득 실어도 군말 없이 달려가 주던 친구. 그런 친구를 어찌 잊는단 말인가.

그런데 애석하게도 그를 3558이라는 숫자로 기억할 수밖에 없다. 처음에 그에게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새로 만나는 친구에게는 이름을 지어 주어야겠다. 그런데 이번엔 누구를 골라야할까. 조건은 아무리 따져 봐도 역시 경제성이다. 지난번에는 고민할 여지도 없이 독일친구를 선택했으나 그사이에 한국국적의 친구들도 경제성에서 뛰어난 도약을 보여주고 있으니 이번에는 한국국적의 친구를 맞아야겠다. 그리고 이름을 지어주리라. 3558을 추억하며.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