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여름날
어느 여름날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 승인 2018.07.02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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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 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여름 하면 떠오르는 소리는 무엇일까? 새 소리, 매미 소리, 파도 소리, 계곡물 흐르는 소리 등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단연 빗소리가 아닐까 싶다. 여름의 무더위를 단박에 씻어내며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 소리며, 언제 그칠지 모르게 연일 내리는 지루한 장맛비 소리는 여름에만 들을 수 있는 소리이다. 비가 내리면 사람들은 집안에 머물게 되고, 비가 그치고 나서 밖에 나가 보면 그 사이에 많은 변화가 있었음을 실감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조선(朝鮮)의 시인 남병철(南秉哲)도 어느 여름날 비에 갇혀 온종일 집에 머물고 있었다.

여름날 우연히 짓다(夏日偶吟)

雨聲終日掩柴門(우성종일엄시문) 종일 빗소리에 사립 닫고 있었더니
水齧階庭草露根(수설계정초로근) 섬돌에 물이 스며 풀뿌리 드러났네.
園事近來修幾許(원사근래수기허) 정원 일 근래에 어느 정도인지 둘러보니
櫻桃結子竹生孫(앵도결자죽생손) 앵두는 아들 낳고 대나무는 손자 보았네.

한여름에 접어들면 비 내리는 것이 다른 때와는 사뭇 다르다. 비의 성년기라고 할까 내리는 양도 많아지고 내리는 시간도 길어진다. 비가 온종일 퍼붓는 경우도 허다한 게 한여름인 것이다. 이럴 때 사람들은 거의 바깥출입을 삼가고 집 안에서 두문불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여름 시인의 거처에도 성년이 된 비가 찾아왔다.

시인도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비 오는 내내 집 밖을 나가지 않았다. 아예 사립문을 닫아 놓은 채로 있었다. 비가 내려 시인이 나갈 일도 누군가 찾아와 들어올 일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리라. 사람 왕래가 없어 적적할 법도 하지만, 하루종일 들리는 빗소리가 이 적적함을 곧장 지우고 만다. 이 날 하루종일 시인이 움직인 공간은 집 안이 전부이다. 방에서 빗소리를 듣다가 밖이 궁금해지면 마루에 나왔다가 이것도 시들해지면 마당 한 바퀴 돌아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런데도 시인의 눈에 들어온 변화는 결코 적지 않았다. 섬돌과 마당 이음새에 물길이 나 풀뿌리가 하얗게 드러나 보였다. 비를 피해 방에 머문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변화의 낌새를 알아챈 시인은 마당 전체를 둘러보기로 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큰 변화가 있었는데 앵두는 열매를 매달았고, 대밭에는 새끼 대나무가 불쑥 자라나 있었던 것이다.

비가 많은 여름은 아무래도 집 안에 머무는 일이 많다. 모든 것이 비에 가려 있어서 변화가 느껴지지 않을 뿐, 비가 만들어 놓은 변화는 결코 만만치 않다. 비가 멈추고 나면 마당이라도 나서서 비가 만든 작은 기적들을 찬찬히 음미하는 것도 여름을 건강하게 보내는 한 방법이리라.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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