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렴의 표상 하연선생의 얼을 찾아간 타진당(妥眞堂)
청렴의 표상 하연선생의 얼을 찾아간 타진당(妥眞堂)
  • 김명철 청주 현도중 교장
  • 승인 2018.06.27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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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역사기행
김명철 청주 현도중 교장
김명철 청주 현도중 교장

 

청주에서 신탄진으로 가다 보면 특장차를 제작하는 광림이라는 회사가 있다. 이곳에서 좌측으로 우록리 고남사 표지판이 있는데 고속도로 굴다리 밑으로 동쪽 고남산을 바라보며 500m 정도 올라가면 작은 마을이 나온다. 산 중턱에 마을을 내려다보며 아담한 옛 집 두 채가 서 있다. 안내판에 `타진당'이라 적혀 있는데, 다른 말로는 `문효영당'이라고 한다.

`타진당'은 조선 세종 때 영의정으로 많은 업적을 남긴 문효공 하연 선생 내외분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건물인데 전국의 여러 곳에 있다. 문효공을 모신 대표적인 서원은 경기도 시흥의 소산서원인데, 이곳에는 선생의 위패만 모셔져 있다.

현도면 우록리에 타진당이 있는 것은 이곳이 진양하씨 문효공파 집성촌이기 때문이다. 타진당은 목조 기와 건물로 맞배집으로 지어져 있다. `타진당'이라는 말은 영정을 편안하게 모신다는 뜻인데, 이곳의 영정은 도난을 당하여 할머니 정경부인 성주 이씨 영정만 따로 보관하고 있는 실정이라 안타깝다. 그러나 전북 무주의 백산서원과 경남 합천의 경모재, 전남 광양의 타진당, 경북 성주의 주일당, 경북 영천의 무원서원 등에서 영정을 봉안하고 있다.

하연 선생은 1396년(태조 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봉상시녹사를 거쳐, 직예문춘추관수찬관이 되고, 이어 집의·동부대언 등을 역임했다. 1423년(세종 5)에는 대사헌으로서 조계종 등 불교 7종파를 선·교 양종 36본산으로 통합하고, 혁파된 사원의 토지와 노비는 국가로 환수하였다. 그 후 1425년에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고 예조 참판을 거쳐, 평안도 관찰사가 되었다가 한때 천안에 유배되었으나, 곧 유배에서 풀려 형조·병조의 참판을 거쳐 1431년에 대제학이 되고 그 뒤 대사헌·형조판서·좌참찬 등 고위관직을 역임했다.

1437년 의정부에 들어가서는 농민들의 세금을 공정하게 부담시키는 그 유명한 연분 9등, 전분6등법을 마련했으며 좌찬성이 되어 70세로서 궤장을 받았다. 이어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1449년에 영의정이 되었다.

하연 선생은 의정부에서 근무한 20년 동안 개인적인 청탁을 받지 않는 등 법과 원칙을 잘 지켜 `승평수문의 재상(昇平守文)이라 칭송을 받았던 청렴과 결백의 표상으로 유명한 분이다.

1454년에 문종의 묘정에 배향되고 숙종 때 진주 종천서원과 합천 신천서원, 청주 우록서원에 제향되었다. 선생이 직접 저술한 책자로 `경상도지리지'와 `진양연고'가 있다. 장수와 부귀, 형통의 복을 구비한 재상으로 불렸으며 아들 3형제도 훌륭하게 잘 키웠다.

최근에 국립대구박물관에서 하연선생과 부인의 원봉영정을 기증 받고 보존처리를 통해 일반인들에게 전시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이제야 선생의 `영정을 편안하게 모신다'는 뜻인 `타진당'의 의미를 찾는 것 같아서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백성을 사랑하고 청렴의 표상이 되었던 경재 하연 선생의 유적이 귀중한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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