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여름날
어느 여름날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 승인 2018.06.04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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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 교수의 한시이야기

여름은 날이 길다. 깜깜할 것 같은 새벽 동창이 이상하리만치 환하고, 어둑어둑해졌을 저녁 시간인데, 해가 쨍하게 나 있다면, 빼도 박도 못하게 여름이 와 버린 것이다. 사람의 관성이 계절의 변화에 적응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길대로 길어진 여름날은 자칫 무료해지기가 쉬운 것은 온통 녹음(陰)뿐인 여름 풍광이 단조롭게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성숙의 계절 여름이 제공하는 풍광은 결코 단조롭지 않다. 조선(朝鮮)의 시인 김삼의당(三宜堂)은 어느 여름날 다양하게 무르익어 가는 여름 정취에 푹 빠져들고 있었다.

여름날(夏日)

日長窓外有薰風(일장창외유훈풍) 날은 길고 창밖엔 훈훈한 바람부네
安石榴花個個紅(안석류화개개홍) 어찌 석류화는 하나하나가 다 붉은지?
莫向門前投瓦石(막향문전투와석) 문 앞으로 기왓돌 던지지 마소
黃鳥只在綠陰中(황조지재녹음중) 지금 녹음 속엔 꾀꼬리가 있다오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봄의 일상에 익숙해진 시인은 어느 날 문득 해가 부쩍 길어졌음을 느꼈다. 이뿐만이 아니다. 창밖의 바람이 이전과는 확연히 다르게 훈훈한 것이 여름이 왔음이 분명하다. 그러고 보니 마당 한켠에 어제까지만 해도 안 보이던 석류화가 눈에 들어온다. 약속이나 한 듯이 다 함께 붉은 옷을 갖춰 입고 여름 손님이 찾아온 것이다. 안석국(安石國)에서 들어왔다 하여 석류화를 안석류화라고도 부르는데, 이 시에서도 그렇게 부른 것인지, 안(安)은 따로 떼어 의문사로 쓴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어느 경우든 뜻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길어진 해, 훈훈한 바람, 붉게 피어난 석류화, 이들은 모두 시인으로 하여금 봄을 지우고 여름을 각인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여름에 대한 각인은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던 듯하다. 마지막으로 시인은 새를 등장시키어 청각을 통해 다시 한 번 여름을 각인하고자 하는데, 그 새는 다름 아닌, 짙은 숲 그늘(陰)에서 여름을 노래하는 꾀꼬리이다. 시인은 꾀꼬리 소리를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대신, 개구쟁이들에게 기왓돌을 숲 그늘로 던지지 말라고 타이르는 방법으로 꾀꼬리 소리에 대한 애착을 간접적으로 그려낸 솜씨가 참으로 절묘하다.

계절은 한날한시에 갑자기 바뀌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서서히 이루어지는 변화에는 둔감한 대신, 계절을 대표하는 사물이나 풍광에는 꽤나 민감하다. 특히 예민한 감각을 필요로 하는 시인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리라. 이러한 의미에서 시인들에게 여름이란 마당의 석류화와 그늘에 숨은 꾀꼬리가 가져다준 선물이다.

/김태봉 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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