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MZ. 1
DMZ. 1
  • 반영호 시인
  • 승인 2018.05.17 20:0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時 論
반영호 시인
반영호 시인

 

여든네 번째 숙모님 생신에 다녀왔다. 10년 전 숙부님이 돌아가시고 혼자 계시는데 참 많이 늙으셨다. 아이들까지 30여명의 자손들이 다 모인 자리로 여간 혼란스럽지 않았다. 본래 이런 자리는 왁자지껄해야 분위기가 맞는다. 부모님과 손 위 일가친척이 모두 돌아가시고 가족 중 마지막 남은 어른이시라 각별하신 분이다.

언어 청각장애인이신 숙모님은 역시 같은 장애인이셨던 숙부님과 결혼하셨다. 태어날 때부터 언어, 청각 모두를 상실한 선천적 장애를 가지고 평생을 사신 분들이다. 경험해본 사람들은 말과 소리를 듣지 못하는 사람과의 소통이 얼마나 답답하고 어려운지를 느껴보았을 것이지만, 어릴 적부터 함께 생활해온 우린 조금도 의사전달의 어려움이나 어색함도 없이 보통사람들과의 대화처럼 자연스레 소통했다.

요즘 판문점이 떴다. 문재인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 위원장의 역사적 만남의 장소가 되었던 곳이다. 판문점은 비무장지대 내에 있다. 비무장 지대, 국제연합군. 조선인민군. 중국인민지원군이 6·25전쟁의 휴전에 합의하며 남북한 간의 적대적 행위로 인한 전쟁재발을 막기 위해 한반도 중앙을 동서로 가로질러 만들어놓은 비무장, 비전투 지역. 이곳이 Demilitarized Zone인데 약으로 DMZ로 표기한다.

DMZ. 내가 군 복무를 했던 곳이다. 비무장지대는 동서길이 248㎞이며,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남쪽 2㎞ 지점을 남방한계선, 북쪽 2㎞ 지점을 북방한계선으로 한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인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전문 제1조에 따라 설치되었고, 남방한계선은 관할권이 연합군 총사령관에게, 북방한계선은 조선인민군과 중국인민지원군에게 주어졌다. 이 지역 내에서는 민간행사와 구제사업을 제외한 어떠한 적대시설이나 적대행위를 할 수 없도록 규정되어 있고 민간인과 군인을 막론하고 군사정전위원회의 허가 없이는 출입할 수 없다. 인원도 어느 한 쪽에서 1000명을 넘을 수 없도록 규정되어 있다. 왼쪽가슴 호주머니 위엔 이름이, 오른쪽호주머니 위엔 DMZ Police라는 패찰을 붙이고 이곳에서 미군부대 카투사로 복무했다. 나는 영어회화에 능숙하지 못했음에도 요직인 작전과의 일원이었다. 작전 통제권이 미군에게 있었으므로 늘 한국군과의 밀접한 관계유지가 매우 중요했다. 통역은 필수다. 영어를 한국어로, 한국말을 영어로 전달해 주는 것이 내 임무요 사명이다.

말 못하고 듣지 못하시는 숙모 숙부님 덕분으로 나는 어려움 없이 통역업무를 무난히 수행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능숙한 수화였다. 주먹을 쥐고 하늘을 향해 `쿵'하면 대포 사격이고, 검지와 집게손가락을 하고 팔을 펴 `탕'하면 권총사격, 왼팔을 쭉 벋고 오른손을 오그린 다음 `타다다다'하면 M16 소총사격, 주먹 쥔 팔을 앞으로 펴며 `쾅쾅'하면 탱크 사격이고, 손바닥을 오리모양으로 구부려 들고 휘파람을 불면 비행기 폭격, 집게손가락을 빙빙 돌리면서 `툿툿툿툿'하면 헬기, 양 손바닥을 앞으로 내보이며 `꾸-왕'은 크레모아, 조심스레 발을 밟으면 지뢰다.

밤이 되면 비무장지대로 순찰을 나가야 한다. 완전군장을 하고 얼굴에 페이스페인팅으로 위장을 하고(참고로 흑인들도 페인팅한다) 남방 한계선을 들어서면 모두가 긴장된다. 서로 선두나 후미에 서는 것을 꺼린다. 물론 맨 앞과 맨 뒤가 위험하기도 하고 겁도 나는 자리지만 무엇보다도 암호 때문이었다. 암호는 우리 한국말이다. 우리가 영어에 대한 두려움과 같이 외국인들도 한국말은 두려운 것이다. 순찰 시에는 절대 정숙이다. 순찰 때 상대방과 맞부딪히면 암호를 대는 것 외에는 모든 것을 수화 내지는 손 사인으로 해결해야 한다. 전진, 후퇴, 정지, 전방주시, 엎드려, 포복, 사격 등 말이 아닌 수화로 통한다. 나는 늘 앞장섰다. 죽음을 무릅쓴 희생에 공짜는 없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