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모습
봄의 모습
  • 김태봉<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 승인 2018.04.30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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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 교수의 한시 이야기
▲ 김태봉<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사람들은 좋은 풍광을 보면 흔히 그림 같다고 말한다. 그만큼 그림이 실제보다 좋게 그려진다는 뜻일 텐데, 정반대인 경우는 드물지만 없지는 않다. 봄의 여러 모습이 잘 어우러져 조화를 이룬 모습은 아무리 뛰어난 화가일지라도 그려낼 수 없는 황홀경 그 자체이다.

근대 중국의 화가 왕곤(汪琨)은 그의 그림 ‘산수’에 제시(題詩)를 하면서 그림보다 황홀한 봄 풍광을 글로 묘사한 바 있다.

 

 

산과 물(山水)

碧峰淸溪遠近春(벽봉청계원근춘):푸른 봉우리 맑은 시내 원근 모두 봄인데
紫門鷄犬接比隣(자문계견접비린):자주색 문 앞 닭과 개 이웃하네
花開酒熟身无事(화개주숙신무사):꽃 피고 술 익으며 번거로움도 없으니
便是桃花源裏人(변시도화원리인):바로 무릉도원 속 사람들이네

 

이 시는 봄의 산과 물을 그린 그림에 붙인 제화시(題畵詩)이고 이 시의 지은이가 전문 화가인 점을 고려하면, 이 시가 회화적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멀리 보이는 푸른 봉우리도 가까이 흐르는 맑은 시내도 모두 봄기운이 완연하다.

이 물씬한 봄기운을 산과 물만으로 나타내기에는 무언가 부족하다. 그래서 자주색 문 안의 사람들과 문밖에서 서로 어울려 노는 닭과 개를 등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봄기운이 가져다준 한가로움과 평화로움이 잘 느껴지는 장면이다. 자주색은 황제나 신선과 결부되는 빛깔이므로, 시 속의 자주색 문은 세속과 떨어져 사는 은자 내지는 신선의 주거 공간을 암시한다.

아무런 세속적 욕심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 이러한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닭과 개가 연출하는 것은 다름 아닌 물아일체의 경지이다. 이러한 경지는 봄에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봄 풍광과 특히 잘 어우러지는 것은 분명하다.

활짝 핀 꽃과 익은 술은 있지만, 번거로움은 없다. 그러고 보니 이 사람은 바로 도연명(陶淵明)이 말한 무릉도원(武陵桃源) 속 그 사람이라고 화가 아니 시인은 설파한다. 사실 무릉도원 속 사람들의 모습을 글이나 그림으로 묘사하기는 역부족이기도 하지만, 이 시가 그리고자 한 것은 무릉도원이 아니라 봄이다. 봄은 푸른 산, 맑은 시내, 사람, 닭과 개, 술, 이러한 요소들이 종합적으로 연출한 황홀경이라는 것이 이 시의 취지이다.

봄을 시로 그림으로 노래로 온전히 표현할 수 있을까? 어떠한 표현 수단으로도 불가능할 것이다. 봄은 몇 가지 표현 요소로 그려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봄은 점이나 선이 아닌 모든 것의 조화이기 때문이다.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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