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의 풍경,유모레스크(Humoresque)
봄날의 풍경,유모레스크(Humoresque)
  • 임성재<칼럼니스트>
  • 승인 2018.04.19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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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논단
▲ 임성재

우리 동네는 시내보다 3~4도 낮은 까닭에 겨울이 길고 봄이 늦다. 시내 벚꽃이 다지고 2주 정도가 지난 지금에야 앞산에 벚꽃이 만발했다. 마당에도 파릇한 기운이 돋는다. 때 이른 나비 한마리가 한가로이 마당을 가로질러 날아간다. 나른한 오후를 선사하는 봄의 전령이 오십여 년 전의 추억으로 나를 이끈다.

초등학교 3학년 때쯤이었던 것 같다. 봄기운이 막 피어오르던 어느 날 나는 교실청소를 마치고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문을 향하고 있었다. 해가 쨍하게 내려쬐는 운동장은 텅 비어 있었다. 가방을 둘러메고 게으른 걸음을 걷고 있을 때 교실 쪽에서 나지막한 음악소리가 흘러 나왔다. 평소 같으면 듣지 못할 만큼 작은 소리였는데 운동장이 텅 비어선지 음악소리는 직선으로 날아와 귀에 꽂혔다. 나는 발길을 멈추고 음악소리에 빠져 들었다. 피아노 소리가 너무 아름다웠다. 어떤 선율이 아름답다고 느낀 것은 태어나서 처음 이었던 것 같다. 이미 나의 발길은 그 소리를 따라 가고 있었다.

그 곳은 교사(校舍) 제일 끝에 있는 1학년 교실이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음악소리는 뚜렷해졌다. 피아노 선율은 경쾌한 듯 아름다웠으나 왠지 슬프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뒤꿈치를 들고 엉거주춤 허리를 숙인 채 교실로 다가갔다. 콩닥거리는 가슴을 안고 살그머니 고개를 들고 유리창문 너머로 교실 안을 훔쳐보았다. 책걸상은 모두 교실 뒤로 물려 있었고, 그 교실 빈 공간에서 한 소녀가 하얀 발레복을 입고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고 있었다. 나를 끌고 왔던 음악은 교탁 위에 있는 탁상용 전축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내 심장은 멎는 것 같았다. 음악과 발레와 여자애가 아름답게 느껴진 것은 처음 이었다. 몰래 훔쳐보는 것을 들킬까봐 황급히 뛰어나왔으나 집으로 가는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시 학교로 돌아와 그 교실 창문 밑 화단에 쭈그려 앉아 연습이 끝날 때까지 그 아이의 몸짓을 상상하며 음악을 들었다. 그땐 무슨 곡인지도 몰랐지만 그 선율 한음 한음이 가슴에 새겨졌다.

그 아이는 나와 같은 3학년이었다. 걔네 집은 마당이 넓고 정원이 잘 가꿔진 2층집으로 동네에서 제일 좋은 집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그 아이의 흑기사가 되었다. 개구쟁이들의 짓궂은 장난을 드러나지 않게 막아주었고, 비 오는 날에는 다른 아이들의 눈에 띄지 않게 가방을 들어주기도 했다. 그렇다고 드러내놓고 친하게 지낼 수는 없었다. 그 당시에는 그런 것들이 흉이 되고 놀림감이 되었으니까.

그렇게 꿈같은 시간이 지나갔는데 5학년이 끝나갈 무렵 어느 날부터 그 아이가 보이지 않았다. 전학 갔다는 소식을 들었을 뿐 어디로 갔는지, 왜 갑자기 갔는지 알 길이 없었다. 아무 말도 없이 떠난 그 아이가 원망스러웠다. 그때부터 학교를 오가는 길이 재미가 없어졌다. 교문 앞 띠기 장사 아저씨의 매혹적인 손놀림은 더 이상 신기하지 않았다. 몇 십 미터 앞에서부터 풍겨오던 꽈배기 공장의 고소한 냄새도, 꽈배기 반죽을 꼬는 아저씨의 신묘한 솜씨도, 끓는 기름 속에서 노랗게 익어가며 부풀어 오르는 꽈배기모양도 나를 유혹하지 못했다. 뱀 장사 아저씨가 길가에 내놓은 커다란 뱀이 담긴 새 술병도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지 못했다.

겨울이 깊어가던 어느 날, 그 아이가 떠난 사연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사업실패를 비관하여 스스로 생을 마치셨고, 빚에 쫒긴 어머니는 아이들을 데리고 한밤중에 동네를 떠났다는 슬픈 소식이었다. 그 후 우리 집도 큰 도시로 이사를 나오면서 그 아이에 대한 기억은 희미해져갔다.

중학교에 들어가서야 내가 늘 흥얼거리고 있던 선율이 드보르작의 유모레스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이후로는 지금까지도 유모레스크를 들을 때 마다 하얀 발레복을 입고 나비처럼 춤을 추던 한 소녀가 떠오른다. 초등학교 3학년, 따사로운 햇살이 비치던 그 봄날의 풍경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뚜렷해지는 내 인생의 아름다운 장면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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