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새벽
봄 새벽
  • 김태봉<서원대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8.03.19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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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 교수의 한시이야기
▲ 김태봉

봄은 뭐니 뭐니 해도 꽃의 계절이다. 매화와 산수유가 봄의 커튼을 열어젖히면 그 뒤를 이어 온갖 꽃들이 앞다투어 나타나 들과 산을 장식한다. 그러나 봄의 풍광은 꽃만이 전부가 아니다. 파릇파릇 돋아나는 풀싹과 나뭇잎은 꽃과 어깨를 겨루는 봄의 또 다른 주인공들이다. 이들 주인공이 서는 무대 노릇을 하는 산과 언덕, 들과 강 또한 그 자체로 봄의 한 부분이다. 신라(新羅)의 시인 최치원(崔致遠)은 새벽부터 봄의 정취에 빠져들었다.

春曉閑望(춘효한망)

山面欄雲風惱散(산면란운풍뇌산):산 얼굴에 기댄 구름은 바람도 흩지 않고
岸頭頑雪日欺銷(안두완설일기소):언덕 가 굳은 눈은 햇빛도 못 녹이네
獨吟光景情何限(독음광경정하한):홀로 풍광을 읊노라니 어디가 끝이런가?
猶賴沙鷗伴寂寥(유뢰사구반적요):모래밭 갈매기를 의지하고 적막함을 짝 삼네

시인은 산과 언덕 그리고 강이 보이는 한적한 곳에 기거하며 봄을 맞았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 시인이 멀리 집 주변을 내다보는 것은 아마도 밤새 봄의 풍광을 그리워했기 때문일 것이다. 시인의 눈은 먼저 산 쪽을 향했다. 산등성이로 구름이 낮게 드리워져 있건만, 웬일인지 바람이 흩어버리기를 고민한다. 바람이 구름을 걷어버리면 봄 산이 밋밋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시인의 생각이다. 다음으로 시인의 눈은 언덕으로 돌아갔다. 언덕 가에는 겨울에 내려서 녹지 않고 완고하게 붙어 있는 눈이 있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봄 해가 그것을 녹이는 척만 하고 실제로는 녹이지 않는 것이었다. 아마도 겨울의 흔적을 매몰차게 지워버리기가 꺼려졌으리라.

이런저런 봄의 풍광을 마음으로 풀어내자면 한도 끝도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시인은 읊조리기를 멈춘 채, 강가 모래밭을 거닐었다. 그랬더니 도리어 갈매기가 믿음직한 벗이 되고, 적막함을 짝 삼게 되는 물아일체의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봄의 풍광은 꽃과 풀 말고도 참으로 다양하다. 산을 두른 구름도, 언덕 위에 녹지 않고 남아 있는 눈도 봄의 풍광 중 하나이다. 중요한 것은 풍광이 아니라, 풍광을 즐길 줄 아는 마음가짐이다. 아무리 풍요로운 성찬(盛饌)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담을 그릇을 먼저 비워놓지 않으면 담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리라.

봄의 축제에 가서 제대로 즐기려면 먼저 마음을 한가하고 여유롭게 가다듬어야 한다. 갈매기도 달아나지 않고 적막함이 짝이 되는 것은 그런 마음의 증좌가 아니겠는가?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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