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말라야의 선물 - ‘히말(흰 산)’-2
히말라야의 선물 - ‘히말(흰 산)’-2
  • 임성재<칼럼니스트>
  • 승인 2018.02.22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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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논단
▲ 임성재

히말라야 마르디 히말 트랙(Mardi Himal Trek)의 종착지는 해발 1,500여 미터에 위치한 르왕이라는 산골마을이었다. 산비탈을 이용해 형성된 마을은 화려하진 않았지만 단아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네팔의 전형적인 산골모습을 간직해서인지 네팔정부가 공인한 홈스테이(Homestay) 마을로 지정되어 있다.

그날 저녁, 우리 일행이 머문 집 마당 한가운데에 모닥불이 피워졌고 한바탕 놀이판이 벌어졌다. 르왕 주민들이 산행으로 지친 우리를 위해 민속춤과 노래를 선사하는 자리였다. 그 자리에서도 우리의 대화는 온통 `히말'의 무용담뿐이었다. 왜 르왕까지 우리를 따라 왔을까, 게으르고 느려 터져 보이는 히말이 어떻게 자신보다 덩치가 큰 개를 이길 만큼 싸움을 잘할까, 히말의 날램과 야수성을 칭찬하는 이야기로 밤은 깊어갔다.

다음날 아침, 일행이 마당 한가운데로 모여 들었을 때 누군가 `무릎 돌리기'를 큰 소리로 외치자 와르르 웃음이 터졌다. 산에 있는 동안 매일아침 산행을 시작할 때나 휴식 후 다시 걷기 시작할 때 지친 몸을 일으켜 세우는 대장의 우렁찬 구호소리를 흉내 낸 것이다. 우리를 태우고 포카라까지 이동할 버스가 도착하자 그 버스 앞에서 산행기간 동안 우리 일행의 식사를 책임졌던 6명의 요리 팀과 일일이 악수하고 포옹하며 작별인사를 나눴다. 히말과도 헤어질 시간이었다. 히말과의 헤어짐이 아쉬워 히말의 입에 10루피의 팁을 물려주고 우리는 버스에 올랐다.

르왕마을에서 포카라로 향하는 큰 길까지 내려가려면 차 두 대가 겨우 비껴갈 만한 넓이의 구불구불한 비포장 산길을 40여분 동안 내려 가야한다. 차멀미가 날만큼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눈을 감고 있다가 설핏 잠이 들려고 할 때 `히말이다. 히말이 따라와요'하는 외침이 들렸다. 우리 일행은 모두 차창 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먼지를 하얗게 뒤집어쓴 히말이 버스를 따라 뛰어오고 있었다.

버스가 왼쪽으로 방향을 틀면 오른쪽 창 쪽으로 히말이 보였고, 버스가 오른쪽으로 방향을 꺾으면 왼쪽 창 쪽으로 히말이 나타났다. 그렇게 40여분을 버스를 따라 달려왔던 것이다. 버스안의 일행들은 모두 창가에 매달려 멀리서 따라오는 히말을 안타깝게 바라보며 탄성을 질러댔다.

버스가 산길을 다 내려와 빈다바리 마을의 평지에 이르렀을 때 나는 버스를 세우라고 소리쳤다. 버스의 속도가 빨라지면 히말이 따라오기 어려울 텐데 이렇게 히말을 떼어놓고 달아날 수는 없었다. 작별인사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버스가 길가에 서자 우리는 모두 뛰어 내렸다. 히말은 목이 말랐는지 길 웅덩이에 고인 물을 허겁지겁 들이 켜고 있었다. 누군가 가게에 들어가 히말이 먹을 만한 것들을 사오고 우리 일행은 모두 히말을 둘러싸고 모여섰다. 누군가 감정이 북받쳤는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도 말을 하진 않았지만 모두의 눈가는 촉촉이 젖어들었다.

우리에게서 자초지종을 들은 그 동네의 가게 주인이 자신과 마을 사람들이 히말을 돌보겠노라고 약속했다. 마음이 놓인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씩 히말과 작별인사를 했다. 긴 작별인사를 마치고 우리는 버스에 올랐다. 버스가 출발하자 히말도 따라나섰다. 우리는 버스의 뒤창에 매달려 히말을 바라보았다. 버스의 속도가 빨라지자 히말은 점점 멀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길 한가운데에 서서 멀어져가는 버스를 우두커니 바라보던 히말의 모습도 시야에서 사라졌다. 우리는 그렇게 히말과 이별했다.

포카라 시내로 들어와 8일 만에 목욕을 하고,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고 면도를 하면서도 머릿속은 온통 히말로 가득 차 있었다. 산을 내려온 이후로 밥을 먹든 한가로이 시내를 배회하든 머릿속에서 히말이 떠나지 않았다. 히말이 던져준 이 감동의 파장은 무엇일까 하는 물음에 잠겼다.

산에서 결심한 것이 있었다. 히말라야의 트래킹코스를 모두 완주해보겠다고. 그래서 올 겨울에는 에베레스트나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쪽으로 가보리라 마음먹었는데, 산을 내려온 이후로는 히말을 만나러 다시 르왕으로 가봐야겠다는 생각뿐이다.

마음먹은 여행을 마치면 무언가를 해냈다는 성취감에 마음이 뿌듯하다. 그런데 이번 여행처럼 생각지 않았던 인연을 만나고 감동을 얻는 경우도 여행의 또 다른 참맛일 것이다. 그래서 여행은 인생을 깨우쳐가는 삶의 한 여정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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