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말라야의 선물 -`히말(흰 산)'- 1
히말라야의 선물 -`히말(흰 산)'- 1
  • 임성재<칼럼니스트>
  • 승인 2018.02.08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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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논단
▲ 임성재

히말라야를 오르는 일은 어릴 적부터의 꿈이었다. 등산가나 탐험가가 되겠다는 의지가 아니라 히말라야 산봉우리에 한번 오르고 싶다는 막연한 동경이었다. 그런데 비록 트래킹이지만 나이 육십을 넘겨 그 꿈을 이루었다. 이번에 다녀온 코스는 마르디 히말 트랙(Mardi Himal Trek) 이다.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ABC)나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EBC)트랙만큼 많이 알려지진 않았지만 능선을 따라 걸으며 안나푸르나 산군(山群)과 히운출리, 마차푸차레를 마음껏 조망할 수 있는 코스였다.

버킷리스트였기는 하나 해발 4000여m를 오르는 일에 도전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평소에 등산을 자주한 것도 아니어서 산을 오르는 체력이 걱정이었고, 어디를 내려올 때마다 통증이 심했던 무릎도 걱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냈던 것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꿈을 접기만 하고 살아온 내 삶에 대한 저항이었다. 이젠 몇 가지 남지도 않은 꿈을 이렇게 포기할 수 없다는 각성이었는지도 모른다.

해발 1000m쯤에서 시작된 걷기는 하루에 고도를 500m씩 올리며 천천히 나아갔다. 힘을 비축하고 고산에 적응하는 과정이었는데 산행에 경험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조금은 답답한 여정이었을 것이나 초심자들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 롯지에서 한나절을 보낼 때 무료함을 달래주는 데는 롯지에 사는 개들도 한몫을 했다.

거의 모든 롯지에는 개들이 몇 마리씩 무리를 지어 살았다. 그런데 대부분은 주인이 없는 개들로 롯지에 오는 손님들을 따라다니며 음식을 얻어먹고 산다고 했다. 해발 2970m의 로우캠프에서 만난 히말(우리 일행이 붙여준 이름이다)도 그런 개였다. 히말은 검은색 털에 두 눈 위에 흰 점이 있는 네눈박이다. 키는 약 70㎝에 몸무게는 30킬로그램 정도로 진돗개보다는 덩치가 조금 더 커 보였지만 귀만 쫑긋하게 섰다면 영락없는 진돗개였다.

히말은 우리 일행이 롯지에 도착한 날부터 살갑게 다가왔다.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머리를 디밀고 몸을 부비며 접근해오기도 하고, 큰 덩치를 대자로 바닥에 대고 누워 누가 만져주기를 기다리기도 했다. 우리는 쉽게 히말과 친해졌다. 다음 날 우리가 산행에 나서자 히말도 따라나섰다. 로우캠프에서 해발 3540m의 하이캠프를 오르는 길목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따라오다가 좁고 굽은 위험한 길이 나타나면 마치 길을 안내라도 하듯 날래게 앞으로 뛰어나가 앞장서서 일행을 기다리곤 했다. 마치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 보호자를 자처하는 듯했다.

히말은 우리의 목표였던 해발 4000m 마르디 히말 뷰 포인트까지 따라왔다. 아니 그 나름으로는 우리를 안내했는지도 모른다. 마차푸차레 봉우리가 코앞에 다가왔다. 우리는 그 품에 안기기라도 한 듯 기쁨과 환희의 탄성을 질렀고 히말도 그 기쁨을 함께했다. 그날 우리는 히말과 함께 그를 만났던 로우캠프로 내려왔다. 거기까지는 히말과의 인연을 별스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느 트래킹 팀이 오든 히말이 보여주는 의례적인 행동으로만 여겼던 것이다.

로우캠프에서 하룻밤을 자고 하산 길에 나섰다. 하산은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길로 마을까지 내려가는 긴 여정이었다. 10시간 가까이 급경사와 수천 개의 계단을 내려오느라 지쳐 히말의 존재를 잊고 있었는데 르왕마을에 도착해서야 히말이 우리와 함께 내려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경험이 많은 가이드 셀파에게 이런 경우가 있었는지를 물었는데 그도 히말처럼 자기가 살아온 경계를 벗어나 이렇게 멀리 따라오는 개는 처음 보았다고 했다.

히말은 우리의 마을 산책길에 따라나섰다. 그런데 그 마을에서 힘깨나 씀직해 보이는 히말보다 덩치가 더 크고 인상도 사나워 보이는 큰 개가 덤벼들었다. 우리 모두 히말이 위험하다고 느끼는 순간 히말은 사람 가슴 높이만큼 뛰어올라 상대방 개에게 달려들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이뤄진 두 번의 공격에 기세가 좋았던 그 마을의 덩치 큰 개는 깨갱하는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고 말았다.

그렇게 순하고 느릿느릿한 몸짓이 게으르게까지 보였던 히말에게 그런 민첩함과 야수성이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모두 놀랐다. 그날 밤 우리는 히말을 칭찬하느라 입이 말랐고, 히말은 알아듣지는 모르는지 우리의 발밑에서 몸을 대자로 뉘고 잠들었다. 그런데 히말이 우리를 울린 것은 그 다음 날 이었다. (다음 주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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