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단한 세력가 집안 안동권씨 3대 묘소이야기
대단한 세력가 집안 안동권씨 3대 묘소이야기
  • 김명철<청주 서경중 교감>
  • 승인 2018.01.31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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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역사기행
▲ 김명철

충북 음성군 생극면에는 조선 초기 대단한 권세를 누렸던 안동권씨 문중의 3대 묘소가 있다. 조선 초기 엄청난 권력을 가졌던 권근, 권제, 권람 세 사람의 무덤이 왜 이곳에 있을까?

할아버지인 양촌 권근은 안동 사람으로 고려말 정몽주, 정도전 등과 같이 친명배원 정책을 펼친 정치가였다.

성리학자이며, 조선개국 공신으로 조선의 건국에 공적을 남긴 사람이다. 그가 1409년(태종 9) 죽자 광주에 묘를 썼다가 1440년(세종 22) 생극면 방축리에 풍수지리가 좋은 땅을 골라 이장했다.

권제는 권근의 아들로 세종 때 집현전부제학과 대사헌, 이조판서, 예조판서까지 역임했다. 나중에는 정인지 등과 함께 용비어천가를 지은 학자이며 정치가였다.

권람은 권근의 손자이며 권제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책 읽기를 좋아해 책을 말에 싣고 명산 고적을 찾아다니면서 한명회와 함께 우정을 나눴던 것으로 유명하다. 1450년(문종 즉위년) 장원으로 과거에 급제해 집현전 교리로서 `역대병요'를 편찬하는데 동참하면서 수양대군과 가까워졌다. 문종이 죽고 단종이 즉위하자 한명회와 함께 계유정난을 일으켜 수양대군을 세조로 만든 1등 공신이다. 이렇듯 대단한 집안이 이곳에 묘소를 조성한 것은 풍수지리적으로 길지이기 때문이다.

할아버지 권근의 묘소를 이장할 때 일화가 전해진다.

양촌의 묘소 조성이 한창일 때 이곳을 지나가던 노승이 있었다. 노승은 상좌에게 목이 마르니 상주에게 가서 물을 얻어 오라고 했다. 상좌는 묘소를 조성하는 곳으로 가서 상주에게 온 뜻을 말했다. 그때 상주는 권제와 권람이었다. 상주는 노승을 당돌하게 여기고 포박하였다. 끌려간 노승은 용서를 구했지만 상주는 곤장을 치도록 했다. 이때 노승이“소승이 불민해 죄를 지었습니다. 우연히 이곳을 지나다가 갈증이 나서 사람들이 모여 있기에 물을 얻어 오라했습니다”라며 “지금 하고 있는 광중(시체가 놓이는 무덤의 구덩이 부분)에서 물이 난다면 그것을 퍼서 버리겠지요? 퍼서 버리는 물이면 갈증 나는 사람에게 한 그릇 주면 얼마나 좋은 일이겠소” 하였다.

상주는 당황했고 이 광경을 본 노승이 결박을 풀어 달라 하면서 광중에서 나오는 물에 대한 대책을 세우겠다고 했다.

풀려난 노승은 묘소 주위의 지형을 살피곤 동쪽 수리산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저 산 중턱에 못을 파면 이곳 물이 저곳으로 빠져나갈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상주는 반신반의하면서 수리산에 못을 파게 했다. 낮은 곳의 물이 높은 곳으로 흐른다는 것은 사리에 어긋나는 황당한 이야기요, 이곳에서 저곳까지 십 리가 넘는데 그곳에서 혹시 물이 난다 해도 그 물은 그쪽 산에서 나는 물이 분명하지 이곳 물이라고는 볼 수가 없었다. 생각 끝에 상주가 증명해 달라고 하자 노승이 왕겨를 가져 오라 하고는 왕겨 한 줌을 광중 물 위에 띄우니 광중 물이 서서히 없어졌다. 얼마 후에 수리산 못 물에서 왕겨가 나왔다는 전갈이 왔다. 이에 상주는 기뻐하고 노승에게 사의를 표했다.

이 일이 있은 후로 5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3년에 한 번씩 안동 권씨 후손은 수리산을 손질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권력가에게 무조건 손가락질하고, 비방하는 것이 아니라 선뜻 도움을 준 노승과 하찮은 노승의 이야기에 주목하는 소통의 훈훈한 광경을 목격할 수 있다. 권근, 권제, 권람 세 사람의 이야기가 특정한 집안의 이야기로 국한할 것이 아니라 조선 500년의 기틀을 마련한 선구자로 시대를 아우르는 귀감의 상징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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