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장 너머 그리움이 가득한 담파고(2)
담장 너머 그리움이 가득한 담파고(2)
  • 임현택<수필가>
  • 승인 2018.01.30 20: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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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임현택

오래된 잎담배 건조실, 회오리를 몰고 들어온 바람은 순식간에 허공으로 흩어진다. 언제부터인가 조금씩 허물어진 흙벽은 노구의 몸처럼 기력이 다하여 한쪽 옆구리가 뻥 뚫려 휑하다. 천장에 길게 늘어진 줄 하나, 누렇다 못해 검으직직 하게 변해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 같은 새끼줄이 측은하게 힘없이 매달려 바람이 흔드는 데로 몸을 맡기고 있다. 양쪽 벽면에 삐딱하게 새끼줄 하나를 칭칭 동여매고 꿋꿋하게 버티는 나무 사다리다. 텃밭에는 담박한 아버지와 동고동락한 담배비닐하우스가 먹다 남은 생선가시처럼 엉성한 뼈대만 겨우겨우 세월을 켜 안고 있다.

담배농사가 한참인 그때, 봄은 멀리 있음에도 혹독한 겨울 속의 비닐하우스 안에는 봄이 한참이다. 비닐하우스에서 자란 잎담배 모종은 꽃샘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밭으로 이식하려 비탈진 밭에 쟁기로 골을 타 두둑을 만들고 비닐을 덧댄다.

산모롱이 밭, 학생 시절 두둑한 둑을 따라 비닐을 풀면서 밭 뚝 끝까지 달려가는 것은 언제나 몸이 가벼운 나의 몫이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봄 날씨, 밭고랑 사이를 달릴 때면 사막보다 더 건조하고 거센 봄바람과 봄볕에 입이 바싹 마르고 금세 피부가 건조해지면서 푸석해진다. 조개껍데기처럼 입을 꽉 다물고 있어도 흙먼지가 들어간 입안은 갈잎처럼 버석거리기 일쑤다.

비닐을 어깨 위에 짊어지고 겅중겅중 밭고랑 사이를 뛰어가면 사각사각 비닐 스치는 소리가 들렸고, 거센 봄바람이 불면 반원을 그리며 공중으로 명주 수건처럼 거침없이 휘날린다. 그럴 때면 중간에 있는 사람들이 비닐을 잡아 밭이랑의 흙으로 한발 한발 발 디딤으로 꾹꾹 눌러놓는다.

명주수건을 펼쳐든 손놀림과 발 디딤 그리고 부드러운 듯 강하게 휘돌아 치며 박을 잡는 무희처럼 비닐을 잡고 달리는 나도 빠른 박을 맺고 풀면서 어깨춤을 들썩들썩 추면서 달린다. 발레 하듯 발끝에 힘을 모아 달리고 달려 두둑을 하얗게 덮어버린 비닐, 어른들은 무희처럼 발뒤꿈치부터 내디뎌 꾹꾹 누르며 한 발짝 간격으로 잎담배 모종을 심는다. 그렇게 해가 중천을 지나면 발목에 모래주머니를 달고 달리는 양 꼿꼿하게 세웠던 나의 몸은 허공에 흩으러 뿌리며 무수한 선을 그리다 바닥에 던져지는 명주수건처럼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꾸 기울어지고 박자를 놓치기 일쑤다. 옛 성인들은 부모 마음속에는 부처가 있고 자식 마음속에는 앙칼이 들어 있다더니 열악한 조건에 툴툴거리며 거들다 보니 이탈한 박자는 엇박으로 박을 맺는다.

노을빛이 물들기 시작하면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듯 한바탕 흥이 고조된 춤사위는 길게 늘어뜨린 명주수건을 품 안에 끌어올리며 마지막 끝나는 박을 맺듯 비탈진 밭은 하얗게 옷을 갈아입었다. 순백 치마저고리에 춤사위를 펼치던 무희처럼 신명나게 골을 타던 고단함도 한 줌 봄바람처럼 날아간다. 서산으로 해가 기울면 모두가 `탕탕'거리는 경운기를 타고 황금빛보다 더 고운 노을빛을 등에 업고 굽이굽이 산 비탈길을 내려온다.

먼발치, 어둠을 밀어내듯 더 힘주고 따라오는 붉은빛을 마주하고 서면 그날이 오버랩 된다. 본능으로 고향으로 돌아오는 연어처럼 고향을 향해 달리는 마음을 꽉 움켜잡는다. 그리고 눈을 감고 멈춰버린 시간으로 들어간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평온을 찾는 고향, 지금쯤이면 비닐하우스가 펄럭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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