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싹
새싹
  • 정명숙<수필가>
  • 승인 2018.01.29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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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정명숙

새로 돋아나는 푸른 싹은 기적이다. 작고 여린 새싹은 비록 얕은 곳에서 태어나지만 헤아릴 수 없이 멀고 깊은 곳으로부터 왔다. 이별과 죽음의 끝에서 돌아와 온 힘을 다해 하나의 세계를 이루고 미래를 쌓아 올린다.

상사화 새싹이 얼굴을 내밀었다. 땅바닥에 바짝 붙은 돌나물도 해맑은 표정이다.

북서 계절풍이 강하고 남풍은 멀리 있지만 언 땅을 비집고 올라온 초록이 야무지고 대견하다.

성장과 희망의 계절이 다가온다는 것을 알려주는 상사화와 돌나물이 결연한 의지로 된추위에도 끄떡없이 버티고 있다. 가장 용감하게 들어서는 봄의 선봉장이다.

잔설이 쌓여 있는 마당을 서성이다 허리를 굽히는 순간 숨어 있는 봄을 만났다. 매년 이때쯤이면 이르다 싶게 싹을 밀어올리는 상사화다. 구근을 나눠 심어야 번식을 하는 상사화와 달리 돌나물은 스스로 자리를 빠르게 넓혀가려는 속셈이리라. 깊은 겨울 속에서 선명하게 드러나는 삶이 대조적이다.

문우 집 마당에 무더기로 올라와 있는 상사화 잎사귀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내게 문우는 꽃이 참 예쁘다며 구근을 여러 개 삽으로 떠서 봉지에 담아주었다.

잎이 자랄 때는 꽃이 나지 않고 꽃이 필 때는 잎이 자라지 않아 서로 볼 수 없어 그리움과 이루어질 수 없는 모든 것을 대변하는지라 마음이 쓰이던 꽃이었다. 몇 해 동안 번식을 시킨 덕분에 제법 무리를 이루는 우리 집 상사화는 잎도 일찍 올라오지만 꽃대도 다른 곳보다 먼저 올라와 핀다.

연한 홍자색으로 낮에는 청순함을, 밤에는 고매함을 간직한 꽃 앞에 서면 나는 사랑의 종말이 아니라 사랑을 꿈꾸는 용기가 생기니 무슨 조화속인가.

그와 달리 돌나물은 억척스럽다. 일부러 심지 않았는데도 어디서 왔는지 번식력이 왕성하다. 마디마다 뿌리를 내리는 강건한 식물체라서 특별한 보호도 필요 없다. 약효로 사용하지만 독성이 있어 함부로 쓸 수 없는 상사화와 달리 참으로 만만한 먹거리다.

오월쯤 황색의 꽃이 피기 전까지 식용으로 사용해도 줄지 않고 제자리를 벗어나기 일쑤라 수시로 뽑아버려도 얼마쯤 지나면 보란 듯이 줄기가 뻗어 있다. 습기가 많으면 무성하고 가물면 바닥으로 몸을 낮춰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참을성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두 꽃의 전설도 예사롭지 않다. 세속의 여인을 사랑하다 상사병으로 죽은 스님 곁에 피어난 상사화의 전설은 안타깝고, 환난을 당해 불타버린 절터에서 목이 달아난 무두불無頭佛의 전신을 에워싸고 황색 꽃을 피워 마치 부처님 전신에 황금 갑옷을 입힌 듯했다는 이유로 신심 깊은 어느 중생이 불갑초佛甲草란 이름을 시주했다는 돌나물의 전설은 경건하다.

해가 바뀌었다. 올해도 변함없이 삶의 회오리바람은 일 것이다. 그것이 오호츠크 해를 지나며 세를 불린 태풍만큼 강렬해진다 해도 견디고 일어서리라. 성취라는 미명아래 영혼을 잠식하는 불안을 달래기 위해선 손익분기점을 따지지 않는 사랑도 함께 품어야 하리. 강추위를 견디는 파란 새싹이 인내를 가르치고 삶의 방향을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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