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지랄 총량의 법칙
개지랄 총량의 법칙
  • 정현수<칼럼니스트>
  • 승인 2018.01.18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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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 論
▲ 정현수<칼럼니스트>

2014년 10월, 서울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에 근무하던 경비원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부의 상징으로 불리는 이 아파트의 70대 할머니가 지속적인 모욕을 가하고 먹는 음식까지 던지자 분을 견디지 못한 고인이 몸에 기름을 붓고 불을 붙였다. 소나 개, 돼지에게 먹이를 주듯 고인에게 음식을 던질 때의 모욕감을 나는 짐작조차 못 한다. 마트나 음식점에서 진상 고객이 돈을 던지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으리라. 할머니는 아파트 경비가 한참 아래 계층이어서 뭔가를 직접 건네거나 가까이 접촉하는 걸 위험으로 여겼으리라.

무술년의 시작과 동시에 이 아파트는 경비원 94명 전원을 해고했다. 상당수 입주민이 소위 사회 기득권인 이들은 현 정권의 최저임금 인상 정책이 고용자에게 부담을 주고 시장의 불안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걸 몸소 증명하고 싶었으리라. 동시에 경비원 분신 사태 이후로 고분고분하지 않고 나이도 많아 부리기에 부담스럽던 경비원을 전원 해고하고 퇴직금 없는 용역 경비원으로 교체하려는 속셈도 있었으리라. 경비원의 최저임금 인상으로 이 아파트의 가구당 관리비 증가액은 커피 한 잔 값도 안 되는 월 3570원에 불과했다.

못된 입주민들의 경비원 괴롭히기는 상상을 초월한다. 겨울에는 전기세가 많이 들고 화재 위험이 있다며 경비실에서 전기스토브를 뺏고 여름엔 지구온난화에 악영향을 준다며 에어컨 설치를 반대했다. 고등학생에게도 허리 굽혀 인사하도록 강요하고 입주민 손에 무거운 짐이나 장바구니가 들려 있으면 쫓아가서 받아주거나 문을 열라고 시켰다. 다른 아파트에서는 변기가 놓인 화장실에서 식사를 하게 했다니 이쯤 되면 이들이 고용한 건 경비원이 아니라 사람과 짐승 사이에 걸쳐 있는 `경계원'이 아니었을까.

한동대 법대 교수 김두식의 책 「불편해도 괜찮아」에는 `지랄 총량의 법칙'이란 말이 등장한다. 이 책에서는 지랄을 `마구 법석을 떨며 분별없이 하는 행동을 속되게 이르는 말'로 규정지었다. 그러면서 사람이 일생 동안 행하는 지랄에는 정해진 총량이 있어서 어느 한 시기에 지랄의 양이 많다면 다른 시기에 그만큼의 양이 줄어든다고 주장한다. 이는 어느 한 쪽을 누르면 다른 쪽이 부풀어 오를 뿐 공기 양은 줄지 않으며, 어떤 부분의 문제를 해결하면 다른 부분에서 문제가 다시 발생한다는 풍선효과와도 맥을 같이 한다.

행복에도 총량이 있을까. 세상의 행복은 정해진 양이 있어서 누군가 많이 행복해지면 상대적으로 나의 행복이 줄어드는 건 아닐까. 한 채에 수십억 원에 이르는 아파트처럼 저들은 세상의 행복과 고통을 모두 금전으로 치환해 행복은 투자 이익으로, 고통은 경제 손실로 판단하는 건 아닐까. 그래서 경비원이 불편하고 고통스러울수록(경제 손실이 많을수록) 저들에게 돌아갈 투자 이익과 기회가 증가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그렇지 않고야 경비원들의 보편적 인권을 박탈하는 데 저토록 집요할 이유가 없다.

그러고 보니 `총량의 법칙'에 의한 인간의 태도 분석은 꽤 설득력 있어 보인다. 승용차 머플러를 개조해 굉음을 내며 질주하는 젊은이들은 관심 총량의 법칙으로, 일부 어른들의 늦바람은 애정 총량의 법칙으로 얼마든지 설명이 가능하니까. 그렇다면 봉건적 우월감에 빠져 경비원들을 괴롭히는 이들의 태도는 어떻게 설명할까. 법석을 떨며 분별없이 하는 행동을 지랄이라고 했으니 이들의 행태에는 강조 접두사 `개'를 붙여도 무방하지 않을까. 이른바 개지랄 총량의 법칙. 이들의 지랄 총량이 다하면 세상이 조금 정의로워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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