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동 영국사와 누교리 이야기
영동 영국사와 누교리 이야기
  • 김명철<청주 서경중 교감>
  • 승인 2018.01.03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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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역사기행
▲ 김명철

영국사는 충남 금산군과 충북 영동군의 경계에 자리 잡은 양산면 누교리 천태산(일명 지륵산) 동쪽 기슭에 있다. 이 절은 법주사의 말사이며, 양산면 일대의 산지와 금강 줄기가 뒤섞여 엮어내는 양산팔경으로 손꼽히는 풍광 좋은 절이다.

절 입구 주차장에서부터 15분가량 절까지 가는 길은 바위 좋고 물 좋고 바람 좋은 산길이다. 큼직하고 시원시원한 바위들 사이로 풍부한 물소리를 들으며 올라가노라면 도중에 엄청나게 큰 미끄럼바위를 타고 내려오는 삼단폭포를 만나 눈과 귀를 씻는다.

거기서 한 구비 더 돌아 올라가면 왼쪽으로 망탑봉 가는 오솔길이 갈라지고, 산속에 어떻게 이런 곳이 있을까 할 만큼 너른 터가 갑자기 펼쳐진다. 절은 그 안에 폭 들어앉아 있다.

절터 위쪽에서 흘러온 물줄기는 앞쪽의 좁다란 다랑논들을 적시고 삼단폭포 쪽으로 내려가는데 그 위로는 어마어마하게 큰 은행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영동군의 관공서마다 걸려 있는 사진 속의 그 은행나무이다.

천연기념물 제223호이며 수령이 500년쯤 된 이 은행나무의 높이는 자그마치 20m에 이른다. 은행나무 너머로 자그마한 대웅전이 보이고 뒤편으로는 천태산 자락이 병풍처럼 주욱 둘러쳐졌다. 편안하고 볕 바른, 한살림 족히 꾸려낼 만한 희한한 산속 터전이다.

영국사가 언제 창건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신라 문무왕 때 혹은 진평왕 때라는 설이 있지만 분명하지 않다.

그후 고려 문종(1046~1083)의 넷째 아들로서 승려가 되어 송나라에 가서 천태교학을 익힌 후 돌아와 고려 천태종을 연 대각국사 의천이 이 절을 크게 중창하였다. 이때 대각국사는 절을 국청사라 부르고 지륵산의 이름도 천태산이라 했다고 한다.

국청사가 영국사로 불리게 된 것은 공민왕 때부터라고 전해진다. 공민왕 10년(1361)에 홍건적이 침입하여 개경을 함락시킬 지경에 이르자 신하들과 함께 남쪽으로 피난을 떠났다. 이원면 마니산성에 머물던 공민왕은 가까운 국청사에 들러 나라가 평안하기를 비는 기도를 했고, 그 후 왕이 `나라의 평안'을 빌었던 절이라고 영국사(寧國寺)로 고쳐 불렀다는 것이다.

그리고 영국사가 있는 `누교리'라는 지명도 이때 절 아래 마을에 살던 사람들이 힘을 모아서 왕이 다니기 편하도록 산 위의 절까지 `칡넝쿨로 엮은 다리'(누다리)를 매달아주었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본래 절터는 지금 대웅전이 있는 곳에서 천태산 주봉 쪽으로 100m쯤 올라간 곳에 있었다고 한다. 그 터는 지금 밭으로 변했는데 부근에서 기왓조각이나 청자, 백자 조각들이 자주 발견되며 오래된 석축들을 볼 수 있다. 지금 영국사에는 동쪽을 바라보고 앉은 대웅전이 자그마한 대숲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 앞에 아담한 통일신라 말의 삼층석탑이 있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맞배지붕집으로 조선 중기 이후의 건물이다. 안에는 삼존불이 모셔졌고 신장탱과 삼장보살도 등이 걸려 있으며 1980년에 해체 복원되었다.

요사채를 지나 남쪽으로 조금 간 곳에는 고려 원각국사비가 있고 또 조금 더 가면 절터를 감싸 안듯 나지막이 뻗어내린 소나무 둔덕에서 작고 단정한 팔각원당형 부도를 볼 수 있다. 절 앞쪽으로 뚝 떨어져 우뚝한 바위 봉우리(망탑봉)에는 자연암반을 기단 삼아 올려진 삼층석탑이 있어 영국사의 명물로 꼽힌다.

지난해 겨울 치열하게 나라를 위해 촛불을 들었던 마음으로 나라의 평안을 빌며 눈이 하얗게 내린 영국사를 다시 찾는다. 임금과 나라를 생각하며 칡넝쿨로 엮은 다리를 만들어 주던 조상의 마음을 되새기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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