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 비치의 밤
화이트 비치의 밤
  • 김경순<수필가>
  • 승인 2018.01.02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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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 김경순

갑자기 이루어진 여행이었다. 그래서일까. 한국을 떠나는 게 쉽지가 않았다. 우리가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는 시각 그곳 보라카이 섬은 태풍으로 아비규환을 이루고 있었다.

결국 비행기는 결항이 되고 우리도 집으로 발길을 되돌려야만 했다. 하지만 우리는 일주일 후 보라카이 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떠나게 된 여행이라 그런지 몇 배는 기대가 되었다.

둘째 딸 아이와 단둘이 떠난 여행길이다. 속이 깊어서인지 평소 자신의 감정도 잘 표현을 하지 않는 딸이다.

12월의 끝자락, 연일 한파로 두꺼운 외투를 입고 사는 우리나라와는 반대로 그곳은 한낮 기온이 28도까지 올라갈 정도로 더웠다. 일정을 여유 있게 잡은 우리는 호텔 수영장과 해변을 거닐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사실 보라카이를 이리도 유명하게 만든 것은 4㎣의 해변에 펼쳐진 산호모래의 “화이트 비캇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산호모래의 해변은 어디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도 이국적인 매력에 빠져들게 했다. 그래서인지 많은 관광객이 밤낮으로 붐볐다. 화이트비치에는 야자수 나무와 해변을 배경으로 수많은 상점이 즐비해 있다. 이곳은 밤낮의 모습이 달라도 너무도 달랐다. 낮의 화이트비치는 해양에서 이루어지는 각종 체험을 위해 정박해 있는 배와 수영복을 입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반면 밤이 되면 배는 오간 데 없고 하얀 모래사장 위로 사람들이 앉아서 즐길 수 있도록 편안한 의자와 상들이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우리도 화이트비치의 밤 풍경에 젖어보고 싶어 걷기로 했다. 어느새 사람들의 복장도 낮과는 달라져 있었다. 저마다 해변에 어울리는 하늘거리는 화려한 옷들이 주를 이루었다. 거리가 온통 조명과 음악들로 술렁거리며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레스토랑 안에서 혹은 해변에서 펼쳐지는 라이브 쇼들을 힐끗거리며 천천히 걷고 있을 때였다. 아주 작은아이가 길섶에 바짝 웅크리고 자고 있었다. 앞에는 긴 종이컵을 앞에 놓고 말이다. 그런데 가만 보니 그런 아이가 한둘이 아니었다. 어떤 아이는 아이만큼이나 작은 엄마와 같이 앉아 있기도 했다. 뜨거운 태양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 피부색이 그런 것인지 모두가 까무잡잡했다. 한참을 걸었는데도 왜 이제야 보인 것일까. 너무 밝은 빛 때문일까. 그도 아니면 들뜬 마음이 그 아이들을 볼 눈을 가린 것일까. 한참을 그렇게 먹먹히 서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걸어왔던 길들을 뒤돌아보았다. 분명 그곳에도 아이들이 그렇게 웅크리고 있었다. 딸아이가 남은 동전들을 종이컵 속에 넣어주니 “고마씁니다”한다. 그 말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과 사람을 지켜봐 왔을지 알 수 있었다. 이상했다. 이제껏 해변의 쇼들과 음악, 조명들에 이끌려 걸어왔었는데 그것들은 이제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았다. 어느새 내 눈은 길섶 어두운 곳에서 웅크리고 있는 아이들만 찾아 쫓고 있었다.

빛이 밝을수록 어둠이 짙어진다고 했던가. 북적이는 관광객과 각종 조명과 소음, 그들을 실어 나르기에 바쁜 트라이시클들. 그것들은 세계 3대 해변이라고 불릴 만큼 아름다운 보라카이를 병들게 하고 있다. 실제로 아름다운 해변만큼이나 시내의 탁한 공기는 숨 막히게 했다. 무엇이 조화로운 삶일까?

게오르크 헤켈은 일찍이 “마음을 여는 손잡이는 바깥쪽이 아닌 안쪽에 있다.”라고 말한 바 있다.

빛이 밝을수록 어두운 그림자는 더욱 길어지는 법이다. 부디 2018 무술년에는 우리 사회가 낮고 어두운 곳에서 웅크리고 있는 이웃들이 들어올 수 있게 마음의 손잡이를 돌릴 수 있는 한 해가 되길 소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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