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 난 계약서
구멍 난 계약서
  • 김경수<수필가>
  • 승인 2017.12.26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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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어느 날 골목길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노영감이 세입자 할멈과 싸우고 있었다. 노영감은 할멈에게 당장 집을 비우고 떠나라는 것이었다. 할멈 또한 노영감에게 전세금과 이사비용을 당장 내놓으라고 소리쳤다.

시간이 좀 지난 어느 해의 일이었다. 노영감은 헌 집 몇 채를 쥐고 셋돈을 받아 살아가는 노인이었다. 그렇다고 돈이 아주 많은 사람도 아니었다. 그도 때론 은행에 빚도 지고 빠듯한 돈으로 집을 수리해 세를 놓다 보니 악착을 떨게 되었다.

또한 전세보다는 월세를 받는 것을 좋아했다. 그렇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을 때에는 전세를 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왜 싸움을 하는지 궁금해졌다. 그들이 싸움하기 전날 할멈의 아들이 노영감을 찾아와 집안에 급한 일로 인해 전셋돈이 필요하다면서 임대계약 조건을 바꾸자고 제의를 해왔다.

노영감은 그렇지 않아도 임대계약을 월세로 바꾸고 싶었던 차였다. 노영감은 이 기회에 사정도 봐주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자신이 원하던 대로 이익을 챙긴다는 생각이 앞서가고 있었다. 노영감은 별 무리가 없을 거라 생각하며 종이쪽지 한 장만 받아두고는 덜컥 돈을 내주었다. 다음 날 받아 둔 종이쪽지 한 장을 들고 계약서를 다시 쓰기 위해 할멈을 찾아갔다. 임차인의 계약자는 할멈이었기 때문이었다.

할멈은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며 계약서를 쓸 수 없다고 했다. 기가 막힌 노영감은 아들이 한 짓이 사기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할멈은 콧방귀를 뀌며 막무가내로 전셋돈을 내 놓으라고 소리쳤다. 화가 난 노영감은 두 모자가 서로 짜고 이런 짓을 벌이는 게 아닌가 싶어 할멈의 주변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법률적으로도 자문을 구해 보았다. 하지만 노영감의 실수로 해석되었다. 아들은 도박에 중독되어 집에 들어오지 않은지 여러 날 되었으며 할멈은 그 돈이 없으면 거리에 나 앉게 생길 판이었다. 늙은 나이에도 몸소 돈을 벌어야 생계를 꾸려 갔던 것이었다.

노영감은 할멈에 대해 알면 알수록 분노와 측은함이 번갈아 엇갈리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구멍 난 계약서는 바람을 타고 어디론가 날아가고 있었다. 할멈은 이제 더 이상 그 집에서 머무를 수가 없었다. 며칠 후 노영감은 할멈에게 전셋돈을 돌려주었다. 할멈의 슬픈 눈빛에 아무런 말이 없었다. 할멈이 그 집을 떠나고 난 후 노영감은 잃어버린 돈이라도 되찾을 것처럼 그전보다 더욱 고약한 놀부영감이 되어갔다.

그렇지만 노영감도 처음부터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그에게도 때론 사람들에게 눈물이 흐르면 그의 가슴에도 강물이 흐를 때도 있었다. 그의 시간도 고달픔 속에 살아왔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를 속이고 이용하려고 하자 노영감도 그에 맞서 돌변해 갔던 것이었다.

사람들에게 공존의 형태는 다양하다. 그중 키 작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치열한 다툼이 누구에겐 토닥거리는 하찮고 시시한 일로 보일지는 몰라도 그들에겐 진지하고 비장함으로 비춰질 때가 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를 위해 밉든 곱든 공존하며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들 성격에 부작용이 난 것처럼 지독하게 변해있다면 그건 생존을 위한 환경 탓으로 여겨질 뿐이다. 거기엔 승패도 선악도 상하도 시비를 말하기가 애매하다고 보여진다. 과연 그대들은 어떤 형태로 삶을 누구와 공존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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