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 받는 내면아이
햇빛 받는 내면아이
  • 이영숙<시인>
  • 승인 2017.12.18 19:3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生의 한가운데
▲ 이영숙

홍상수 감독의 `밤의 해변에서 혼자'를 니체적 시각으로 해석하면 무리일까. 해변에서 막대를 꽂고 앉은 주인공 영희, 막대와 영희의 그림자가 각각의 실체와 일치한다. 이 영화를 실존이라는 트랙에 올려놓고 감상해도 지나친 논점 일탈은 아닐 것이다.

주인공 영희가 계속해서 반복하는 질문 “당신 나 알아?” 꿈틀거리는 무의식, 자아와 초자아를 등에 지고 갈등하는 주인공의 내면을 살피면서 오롯한 실체를 찾는 실존 문제로 해석했다. 즉 `내일은 내일에게'라는 니코스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적 사고이다.

그리스의 지중해는 늘 일조량이 넉넉한 곳이다. 그래서일까. 그곳 사람들의 표정은 늘 느긋하고 안정돼 보인다. 인간의 감정이 날씨와도 영향관계가 있다면 충분히 일맥상통한 부분이다. 누군가 햇빛을 실존의 상징이라고 말했듯 그날그날 현재를 중시하는 사고를 지중해성철학이라 말한다. 같은 바다를 보고도 날마다 새롭게 바라볼 줄 아는 사고, 알베르 카뮈의 작품`이방인'의 뫼르소적 사고이다.

요즘 들어 만지고 느끼고 찢는 형이하학적 사고에 가깝다 보니 모든 것이 새롭다. 햇빛 쏟아지는 하늘도 새롭고 압력밥솥 빙글거리며 돌아가는 모습이나 욕실 가장자리에 놓인 칫솔도 새롭다. 일상적인 것들과 낯익은 것들의 재발견이다. 인생의 전반부가 `오름'이라면 인생의 후반부는 `내림'이고 인생의 전반부가 형이상학적 가치들의 향연이라면 인생의 후반부는 형이하학적 가치들의 재발견인 듯싶다.

원점으로 돌아와 다시 일상을 바라본다. 햇볕 따갑다고 우산 펼 일 아니고 밥솥의 추가 시끄럽다고 귀 막을 일이 아니다. 그때마다 있어야 할 것들이고 없어선 안 될 삶의 소중한 부분이다. 그러고 보니 나 자신도 그랬다. 남 먼저 살피느라 자신은 늘 뒷전에 밀려 있었고 나는 늘 그런 사람이라는 인식에 들었다. 남을 위한 배려라는 등불을 걸고 산 밤 시간이 너무 길다. 영화 `밤의 해변에서 혼자'의 주인공 영희처럼 “당신, 나 알아?” 어둠 속에서 배회하며 갈등한 것들의 재발견이다.

햇빛의 역할, 바람의 역할, 물의 역할, 공기의 역할, 화장실, 칫솔, 걷는다는 것 등등 너무 낯익어서 가치를 발견할 수 없던 것들이 새롭게 조명된다. 그것들이 새로운 가치들로 부상하는 요즘, 나 역시도 오롯이 나 일 수 있는 현실적인 시간으로 돌아오는 중이다. 뫼르소나 조르바, 니체 모두 내일은 내일에게 미뤄두고 오늘의 주인공으로 산 실존주의자들이다. 통념이라는 것들에 대한 망치를 휘두르며 새로운 가치들을 세워나간 창조적인 사람들이다.

내게 요즘 햇빛은 망치이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 두 발로 직립하는 지금 이 순간이 내가 나 일 수 있는 실존의 순간이다. 영희가 막대를 꽂아 놓고 앉아 있는 시간, 그녀의 반 접힌 몸만큼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해변, 타자로 살아온 그녀처럼 본질적인 자아를 만나는 시간이다. 배려와 연민이라는 미명, 그 이타주의마저도 결국은 심각한 이기주의라는 것을 깨닫는데 너무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형식적인 인간으로 사느라 저 무의식의 심연에서 굼벵이처럼 쪼그리고 있는 내면아이, 이제 그 내면 아이를 불러내 햇빛을 쬐어줄 시간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