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게
홍게
  • 정명숙<수필가>
  • 승인 2017.10.26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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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정명숙

어시장에도 가을은 온전히 내려앉아 있다. 짧은 저녁 햇살에 좌판마다 붉은 단풍이 절정이다. 햇살 한 줌 없는 심해의 모랫바닥을 기어다녔을 뿐인데 저리도 맑고 고운 색으로 물들었다.

붉은 홍게는 배를 하늘로 향한 자세로 수북이 쌓여 작은 선홍빛 산으로 누워 있다. 검은 눈동자 속에 가을 하늘이 파랗게 고여 있다. 바다의 비린 냄새가 코에 닿아도 어쩌지 못한다.

1000미터 수심 깊은 바다 속에서 하루아침에 좌판에 누워 누군가의 미각을 충족시키려 기다리는 신세가 될 줄 어찌 알았겠는가.

동네주민들이 일 년에 한 번 당일치기 여행을 떠나보자고 결정한 것이 삼 년 전이지만 올해 처음으로 참여했다.

산속 마을에서 살고 있으니 가까이서 단풍구경을 할 수 있어 좋다고 했는데 사람과의 간격도 조금은 떨어져 있어야 애틋함이 더하듯, 멀리서 보는 산야가 더 아름다웠다.

영덕의 바람의 언덕에서 내려다보는 바다를 배경으로 돌아가는 풍력발전기와 한결 고즈넉해진 해변과 바다를 옆에 두고 걷는 해파랑 길은 이국적인 풍경으로 연신 감성을 자극한다. 늦은 시간까지 단풍과 바다에 푹 빠져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기 전 들른 곳이 후포 항이다.

어시장에는 홍게가 많았다. 대게 철이 아니다 보니 대게의 대체품목으로 홍게가 박달홍게라는 새로운 이름을 달고 후포 항 시장을 점령해 버렸다.

대게나 꽃게처럼 금어기가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어서 사계절 잡을 수 있으니 싸고 양도 많다. 어느 사람은 포항이나 강구항 등 동해가서 홍게를 먹고 대게를 먹었노라 으스대지만 다른 게들에 밀려 항상 싸구려로 취급받고 뒷전으로 밀린다.

개체 수가 많아 상인들조차 귀히 여기지 않는다. 게다가 트럭 덕분에 홍게의 위상이 크게 실추되기도 했다.

1990년대쯤 시작되었던가, 한겨울, 거리의 트럭에서 대형 찜기를 놓고 홍게를 쪄서 팔았다. 비릿하고 구수한 냄새가 지나는 사람들의 발길을 잡았다. 퇴근길의 가장이 소주 한잔으로 하루의 피로를 풀고 싼 맛에 가족을 위한 특별식으로 사들고 가도 좋은 소리를 듣지 못했다.

애초부터 죽은 것이라 속이 비어 먹을 게 없었다. 그런 경험을 한 사람들은 살이 없다고 기피하지만 살아있는 것은 속이 꽉 차있어 대게보다 훨씬 맛이 좋다.

홍게는 많고 넉넉해서 귀한 대접을 받지 못했다. 요즘은 사람도 마찬가지다. 아이는 귀하고 노인은 흔하다. 아무리 고운 단풍으로 물들었다 해도 함부로 취급될 노인이 된다. 피할 수 없는 현실의 무게가 좌판의 홍게 위에 함께 올라앉는다.

심해에서 제 삶에 충실했던 홍게가 자신을 따라다니던 말들을 온몸에 두르고 붉은 단풍으로 저물고 있다. 잠깐이면 닿을 수 있는 바다가 너무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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