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대헌 <에세이스트>
  • 승인 2017.10.19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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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헌의 소품문 (小品文)
▲ 강대헌 <에세이스트>

“멀리서 오셨네요.”

서울 나들이만 가면 듣게 되는 소리예요. 얼마 전에도 그랬어요. 안국역 1번 출구로 나갔던 인사동에서도 그랬고, 같은 역 4번 출구로 나갔던 돈화문에서도 그랬어요. 틀린 말은 아니죠. 빨리 움직여도 하루의 낮 시간이 거의 다 달아나게 되니까요.

강남고속터미널에서 지하철을 타려고 에스컬레이터에 올랐다가, 그만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어요. 급한 마음에 뒷쪽으로 손을 내밀었는데, 누군가가 잡아주었어요. 문제는 그분까지 제가 흔들어버린 거예요. 다행히도 둘 다 넘어지는 일은 없었어요.

허공을 헤매던 제 손을 잡아준 분은 몸이 불편하신 고령의 어르신이었는데, 많이 놀라셨던 모양입니다. 죄송했어요. 식겁하기도 했지요. 나들이 왔다가 밤 9시 뉴스에 나올 뻔했던 거니까요.

인사동 미팅 후, 점심을 먹으려다가 퇴짜를 맞았어요. 혼밥 손님을 받지 않는다는 거예요. 괜히 머쓱해지더군요. 가게를 쓰윽 휘둘러보고는 곧장 발길을 돌렸죠.

다른 골목길 식당에선 미리 물어봤지요. “혼자인데 식사할 수 있나요?”

안국역 4번 출구와 관련된 일이 남아 있어서 1번 입구로 다시 들어오는데, 계단 중간 위치에 어떤 분이 무릎을 꿇고 있었어요. 초라한 행색에 고개까지 푹 수그려서 얼굴을 알 수 없는 그분이 세상을 향해 내민 것은 마르고 텅 빈 두 손 뿐이었죠. 지나치는 사람들이 없을 때를 기다리다가, 그분의 손바닥에 작은 성의를 놓았어요. 그분의 내민 손이 마냥 부끄러워지는 게 싫더군요.

에스컬레이터에서 흔들리다가 허공을 향해 내밀었던 제 손도 누군가가 잡아주지 않았다면, 정말 부끄러웠을 겁니다. 4번 출구로 나가서는 생황을 찾아 나섰어요. 우리 악기 중에서 2개 이상의 음정을 동시에 낼 수 있는 유일한 화음악기가 생황이지요. 돈화문 국악 당에 갔더니, 생황이 김효영 연주가에게 딱 달라붙어 있어서 떼어낼 수가 없더군요. 그들의 15년 동고동락의 세월이 어찌 가벼울 수 있겠어요.

나흘 동안 이어진 `미래의 명곡(New Masterpiece)'릴레이 공연의 마지막 프로그램은 윤이상과 박경훈의 작품들이 `김효영표 생황'을 만나 얽매인 것도 풀어주고, 눈물도 닦아주고, 어깨춤을 들썩거리게도 했지요.

피리와 아코디언을 대신해 가락과 선율의 만찬을 베푼 김효영의 활약상은 경이로웠고, 피아노의 박경훈과 첼로의 강찬욱이 함께 어울린 코너는 가을의 느낌을 짙게 채색을 해주었답니다. 앙코르로 들었던 `섬집아기'는 모랫길을 달려오는 엄마의 바쁜 마음을 떠올리게 했지요.

생황을 잡은 김효영의 손은 관객의 얼굴들을 하나씩 찬찬히 빛나게 했지요.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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