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과 신변잡기
돌과 신변잡기
  • 최명임<수필가>
  • 승인 2017.10.16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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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최명임

흔적만 남은 고향 집에 돌담이 버티고 있다. 아직도 꿈을 꾸는 것일까. 담쟁이넝쿨도 여전히 떼를 쓰며 기어오르고 있다. 눈물겨운 돌을 주섬주섬 집어왔다. 산골 그 애틋한 고향을 내 삽짝에 옮겨놓고 꿈같은 이야기를 나눈다.

고향 집 돌은 나를 닮아 세련미나 멋스러움이 없다. 촌티가 풀풀 나지만 우리 집 내력과 희로애락을 담고 있어서인지, 볼 때마다 정겨움을 느끼고 까닭 없이 눈물이 나는 날도 있다. 그만 돌과 사랑에 빠졌다. 돌을 하나씩 줍다 보니 전국구의 돌이 어우러져 조화를 이룬다. 마주하고 앉으면 명상음악을 켜 놓은 듯 편안해진다.

아예 주말마다 행장을 차리고 나선다. 돌밭에 서면 눈이 아프도록 돌을 걸러낸다. 수석의 조건은 무시하고 내가 좋으면 취하는데 일방적이다. 흔하디 흔한 돌에서 행복을 줍는다. 행복의 조건은 대단한 무엇이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보다. 수필을 접하고 푹 빠졌을 때처럼 꿈을 꾼다. 꿈에서도 글을 써 내려갔듯이 돌을 찾아 산으로, 강으로 헤매는 꿈을 꾼다. 이 또한 집착이 될까 걱정이다.

처음 눈에 들어왔던 돌이 있다. 실타래를 풀어 옴짝달싹 못 하도록 칭칭 동여맨 모습이 신기했다. 빼도 박도 못하는 인연의 사슬에 묶여 그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어머니 같고, 나인 듯도 하다. 가끔 물을 뿌리면 까만 돌을 묶고 있는 하얀 실선들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풀어놓은 실을 되감아 완전히 해방된다면 그때도 저 돌에 의미를 둘 수 있을까. 지난한 어머니의 삶이라서 내 눈에 더욱 빛나 보였듯이, 무미한 돌을 얽어맨 사슬로 돌은 의미를 부여받았다.

목도리를 한 올빼미도 있다. 부스럼쟁이, 생각하는 병아리, 무희, 아기공룡 둘리, 애벌레, 만삭의 어미도 있다. 이름은 그럴듯한데 주제가 희미한 나의 글처럼 모호하다. 수필도 수석도 깜냥이 되지 못하지만 스스로는 취해서 희열에 빠져 있다.

사람멀미에 속이 울렁거리고 말의 소음에 두통이 나는 날이 있다. 사람 안에서 사람을 배우고 사람에게서 언어를 배우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인데 사람을 벗어나면 날아갈 듯 가벼움을 느낀다. 사람에 대한 결벽증일까.

돌의 언어는 간결하다. 사람의 언어도 그랬으면 좋겠다. 돌을 줍는 날은 나의 언어도 돌을 닮아 가는 듯 음전해진다. 붓방아질을 하다가 잡다한 언어로 사설만 늘어놓은 내 글도 언젠가는 돌의 언어처럼 간결해지리라 믿는다. 한 편의 명수필로 내 글에 정점을 찍게 되는 날을 꿈꾼다.

모든 일은 정성과 기다림이 필요하다. 어렸을 때 어머니는 시루에 떡쌀을 안치고 떡이 다 익을 때까지 말문을 닫으셨다. 좀이 쑤셔 어머니 곁을 맴돌면 소리 없는 언어로 나를 내치셨다. 설마 언어의 해악이 떡에까지 미칠까 싶은데 이제야 절절하게 공감한다. 어머니도 나도 떡이 다 익어야 말문을 열었는데 그때처럼 지금도 기다림이 필요하다. 나의 신변잡기가 수필로 격상하는 일도, 돌의 언어를 배우는 일도.

하지만 돌을 줍는 일은 신변잡기에 머물러도 좋겠다. 값비싼 수석에 연연하면 욕심이 요동을 칠지도 모른다. 그러면 돌의 순수한 언어마저 그 욕심 안에 매몰되어 버릴까 봐 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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