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치 장단에 빗자루 덩실덩실
까치 장단에 빗자루 덩실덩실
  • 전영순<수필가>
  • 승인 2017.09.28 19:2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生의 한가운데
▲ 전영순

단풍이 물들어갈 때면 알밤 빛을 지닌 다정한 친구들과 인정으로 살찐 일가친척들이 있는 고향으로 마음이 달려간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우물 속 같던 동네에 푸른 달빛이 바람에 일렁이는 나지막한 집은 따뜻했다. 고향을 등지고 나온 지가 수십 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뒷산의 상수리나무, 개울가의 미루나무, 우물가 앵두나무, 언덕의 살구나무, 마당가의 무궁화나무가 눈에 선하다.

귓가에는 나무들을 벗 삼아 지저귀던 뻐꾸기, 소쩍새, 까치 소리가 쩌렁쩌렁하다. 뚜렷한 사계절과 명절이 심심치 않게 들어 있는 이 땅에서 숨 쉬고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나는 좋다. 이 충만한 기쁨의 원천은 어쩌면 자연을 벗 삼아 지냈던 어린 시절의 적막한 환경과 일가친척들의 인정 어린 마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 같다.

한 가정의 며느리가 된 나는 명절에 시댁보다는 친정으로 마음이 먼저 달려가는 것은 왜일까? 이 화두에 누가 태클을 걸면 걸수록 솟구쳐 오르는 힘은 또 뭘까? 이것은 바로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본향을 향한 뿌리의 힘일 것이다.

명절 때 귀성길은 참 기쁘고 신나는 행로인데 결혼한 여자에게는 자주 덜커덩거린다. 조상이 가족·친지 간의 우애를 미덕으로 삶았던 명절이 언제부터인가 현대인 소수에게는 다소 불편함을 가져다준다. 우애 좋은 집안의 형제들은 반색하며 달려가는 귀성길이겠지만, 불편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은 명절이 마치 수용소로 끌려가는 기분일 게다. 그나마 아직은 한가위란 명절이 우리에게 크게 자리하고 있어 고향을 떠나 사는 이들의 발길을 훈훈하게 하고 있지만 말이다.

명절이란 우리 민족에게는 참 값지고 고귀한 문화인데 현대인에게는 불편한 존재로 소원해져 가는 것 같아 아쉽다. 자본주의가 빚어낸 인간관계 상실증 중 하나인 것 같다.

시골 출신인 나는 추석 한 달 전부터 객지에서 생활하는 삼촌과 친지, 나와는 상관없는 이웃사람들까지도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동네 사람들은 추석맞이로 집집마다 집과 동네 길을 손보며 분주했다. 나는 맨드라미 몇 포기 심어 있는 마당을 하늘이 보이도록 쓸고 쓸고 또 쓸었다. 내 선물을 양손에 가득 들고 올 삼촌들을 생각하며 마당을 힘껏 쓸었다. 빗자루에서 까치 소리보다 더 신명나는 `사사삭 사사삭'거리는 소리가 났다. 까치도 내 마음을 읽었는지 내 비질하는 소리에 질세라 하늘에 음표를 달아 높이 올렸다. 명절 때만 되면 조용하던 시골 마을이 시끌벅적거리며 사람 사는 맛이 났다.

특히 나는 셋째 삼촌을 많이 기다렸다. 삼촌은 명절 때마다 새 옷과 새 신발을 사 오셨다. 칙칙한 옷만 입고 다니던 시골뜨기 나는 삼촌들만 왔다 가면 말쑥한 계집애로 탄생했다. 나는 새 옷과 새 신발을 신고 우직골에서부터 아랫마을 천방까지 폴짝폴짝 뛰며 하루에도 몇 번을 왔다 갔다 했다.

새 옷도 새 신발도 사람들도 그리 반가울 게 없는 요즘, 성인이 되어도 어렸을 때 추억이 값지게 남아 있는 걸 보니 어린 시절의 정서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느끼게 한다. 고향이 얼마나 그리우면 우리 속담에 흉조인 까마귀도 고향 까마귀는 반갑다고 했을까. 글을 쓰는 동안 앞가르마 반듯하게 타시고 마루에 앉아 바느질하던 하늘나라에 계신 얌전한 할매가 그리워진다. 마음은 까치 소리 지저귀는 친정으로, 몸은 밤송이 떨어진 시댁으로 향하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