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웅 이순신의 우국충정과 그리움이 가득한 통영
성웅 이순신의 우국충정과 그리움이 가득한 통영
  • 김명철<청주 서경중 교감>
  • 승인 2017.09.06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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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역사기행
▲ 김명철

영화 `명량'을 재미있게 보았던 기억이 난다. 1592년 임진왜란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전쟁이라 할 수 있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의 승리가 없었다면 우리는 어쩌면 일본의 식민지가 500년 전에 시작될 뻔했다고 생각하면 정신이 아득해진다. 왜군과의 전쟁에서 23전 23승의 전승 신화의 주인공 이순신 장군이라도 12척 대 330척이라는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명량해전은 감동 그 자체였다.

그런데 그보다 5년 앞선 1592년 7월에는 한산도 앞바다에서 한산대첩이 펼쳐졌다. 한산대첩은 진주대첩, 행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의 하나이자 세계 해전사에서 빛나는 전투로 임진왜란의 판도를 바꾼 전투였다. 이를 기리는 의미에서 매년 8월 중순에 통영에서는 통영한산대첩축제가 열린다.

한산대첩이 펼쳐진 지 올해로 422주년. 방학 기간을 이용해 역사의 현장이자 300년 삼도수군통제영의 문화가 살아 있는 경남 통영으로 갔다. 한산대첩축제는 충렬사에서 거행되는 고유제 봉행을 시작으로 성대한 막을 올린다. 이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한산대첩 재현 행사이다. 산양읍 당포항에서 한산대첩 출정식을 가진 후 오후 6시부터 통영 앞바다에서 한산대첩이 재현된다. 422년 전 왜선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한 뒤 학익진으로 섬멸했던 한산대첩. 그 승리의 순간이 화려하게 펼쳐진다.

통영 앞바다에서 벌어진 한산대첩은 오늘날 거제대교가 가로지르는 통영과 거제 사이의 좁은 물길인 견내량에서 시작된다. 이순신 장군은 왜장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73척의 일본 함대를 이끌고 견내량에 정박해 있다는 첩보를 접하게 된다. 물길이 좁고 암초가 많은 견내량에서는 조선의 주력 함선인 판옥선에는 불리한 여건이다. 그래서 이순신 장군은 일본 함대를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해 학익진을 펼쳐 함포 사격으로 왜선을 마음껏 유린했던 것이다. 한산대첩 승리의 요인은 학익진 전법이 주효했지만 튼튼한 판옥선과 미리 개량하여 준비한 조선 수군의 천자, 지자, 현자, 황자총통이라는 화포 덕분이다. 이 전투에서 일본은 59척의 배를 잃었고, 일본의 수군 맹장으로 이름을 떨치던 와키사카 야스하루는 겨우 생명만 건진 채 달아났다. 인근 섬으로 도망친 400여명의 왜군은 13일간 굶주리다 죽거나 도망을 쳤고, 왜군은 후퇴를 거듭해야 했다. 한산대첩은 한마디로 일본과 조선의 국운이 뒤바뀐 전투였다.

한산대첩 재현 행사를 보면서 나는 온갖 모함과 박해와 오해 속에서도 나라와 백성을 위한 소명을 분명히 하였던 이순신 장군을 계속해서 생각했다. 장군은 백의종군이라는 치욕적인 처분도 묵묵히 감내하며 오직 백성과 민족을 먼저 생각하신 분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꿋꿋이 자신의 가치관을 관철했고, 위로부터의 잘못된 처분과 압박에도 명분과 백성의 생명을 위해 명령을 거부했던 정의로운 분이었다는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여객선을 타고 이순신 함대의 사령부였던 곳 한산도를 찾아갔다. 이곳에는 `승리를 만드는 집'이라는 의미의 `제승당'이 있고, 바로 옆에 `수루'가 있다.`한산섬 달 밝은 밤에'로 시작하는 유명한 장군의 시가 남해를 조망하며 걸려 있다. 낮에는 왜적의 동태를 살피고 밤에는 가족 생각과 백성 생각에 잠 못 이루었을 장군을 생각하며 시를 읽으니, 이 바다를 지켜야만 나라가 살고, 백성이 살 수 있다는 절박한 장군의 심정이 느껴져 또다시 가슴이 먹먹해 온다. 자신의 이익과 욕망만 추구하며 이기적으로 살았던 스스로를 반성하면서 아쉬운 발길을 돌린다. 우국충정의 마음과 가슴 먹먹한 그리움을 안고 내년에도 꼭 다시 찾아오겠다는 약속을 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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