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광복절과 음성지역의 3.1 만세운동
8.15 광복절과 음성지역의 3.1 만세운동
  • 김명철<청주 서경중 교감>
  • 승인 2017.08.23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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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역사기행
▲ 김명철

1945년8월15일 광복절! 민족 해방과 광복의 기쁨을 가져온 결정적인 사건을 꼽는다면 3.1운동일 것이다. 3·1 운동은 일제 강점기 한국인들이 일제의 지배에 항거해 한일병합조약의 무효와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며 1919년 3월1일부터 전국적으로 일어난 비폭력 만세운동이다. 고종의 독살설이 직접적 계기가 됐는데, 고종의 인산일인 1919년 3월 1일을 기해 한반도 전역에서 일어났다.

음성지역에서도 3.1운동이 일어났는데 기록에 의하면 가장 대표적인 만세 운동으로 소이면 한내장터의 만세 운동을 평가한다. 4월1일 김을경·이중곤·권재학·추성렬·이교필 등 수천 명의 군중이 독립만세운동 시위에 참가했다. 이들은 소이면사무소로 달려가서 면장 민병식을 끌어내어 독립만세를 선창하도록 하였다. 이때 출동한 일본경찰에 의해 김을경·이중곤 등 주동자 9명이 체포되어 구금되었다. 이에 시위군중은 주재소로 달려가 그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창문을 파괴하는 등 항의를 하였다. 그러나 충주에서 출동한 일본수비대의 무차별 발포로 12명이 사망하고, 40여 명이 부상당하며 해산했다.

음성지역에서 최초로 만세 시위가 시작된 것은 3월20일 삼성면과 맹동면이다. 삼성면에서는 이성교·임백규·유해길 등이 주동이 되어 3월20일 인근 산 위에 봉화를 올리며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했고, 맹동면에서는 천도교인 김동환이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수백 명의 주민이 시위와 봉화를 올리며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삼성면에서는 그 뒤 4월2일 오후 8시쯤 수백명의 면민이 동리별로 만세운동을 전개하고, 천평리에 있는 면사무소에 모였다. 잠시 후 1000여명으로 늘어난 시위대는 낫과 몽둥이로 면사무소 건물 등을 부수고, 경찰관주재소로 몰려가서 독립만세를 외친 뒤 새벽 2시쯤 해산했다. 맹동면에서도 4월2일 쌍정리와 3일 마산리·쌍정리 등에서 각각 수백명의 주민의 만세시위가 전개됐다.

음성읍에서는 3월28일 오후 2시, 서당생도들을 주축으로 한 만세운동에 이어, 4월6일 밤 9시 500여 명의 시위군중이 산 위에 봉화를 올리고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감곡면에서는 4월1일부터 4일까지 주촌리·문촌리 주민 수백 명이 응봉산에서 봉화를 올리고 면사무소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했고, 4월5일 원남면 보천장터에서, 11일 원남면 주봉리에서 각각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대소면에서는 평소 항일의식이 투철했던 박병철·민병철·박영록·박제성 등의 주도로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4월2일 밤 대소면 오산리에 있는 대소면사무소에는 사전 약속에 따라 천여 명의 군중이 모였다. 이들은 군중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배부했으며, 군중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이때 면장과 면 직원들이 나타나 시위의 중단과 해산을 종용하였다. 이에 격분한 시위 군중은 대소면사무소의 유리창과 기물을 부수고 장부를 파손시키는 등 격렬한 시위를 벌인 뒤 면사무소에 불을 질렀다. 상황이 다급해지자 진천 수비대가 응원, 출동해 무력으로 시위 군중을 해산시켰다.

음성군에서 일어난 3·1운동은 타지역에 비해 늦게 시작됐고, 그 규모도 컸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음성군 전역에서 거의 만세운동이 일어났고, 항쟁도 격렬했다. 일제 경찰의 잔혹한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4월 중순까지 지속적으로 만세 시위를 계속한 점도 3.1운동의 전형을 보여 준다. 특히 소이면의 한내장터 시위는 충청도 전역에서 순국자가 가장 많이 발생한 지역으로 손꼽힌다.

역사는 그냥 이루어지지 않는다. 누군가의 땀과 헌신, 피흘림의 대가라는 사실을 역사는 가르쳐 준다. 개인을 넘어 나라와 민족을 향한 애타는 심정과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그분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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