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생활 - 행복의 더함
일상생활 - 행복의 더함
  • 안승현<청주공예비엔날레 팀장>
  • 승인 2017.08.22 20:0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미주알 고주알
▲ 안승현

먼발치 후드득 빗방울이 밀려오는 사이, 짙은 녹음에 붉디붉은 한 점의 색에 이끌려 피할 사이도 없이 온몸으로 비를 맞았다. 눈을 덮은 머리카락은 아래로 물을 흘러내리고 속옷까지 비에 젖은 상태에서도 한 점의 색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시골생활은 풀과의 전쟁이다. 아무리 자연친화적으로 산 다해도 허리까지 자라는 풀을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없기에 짧은 시간 집중해 풀 제거에 온 힘을 다한다. 그러다 보니 하얀 연꽃이 언제 피었는지, 장미 덩굴이 벌레의 침략으로 헐벗었는지, 주변의 풍광을 감상할 틈을 주지 않는다. 언제나 내 눈에 들어오는 제거해야 할 대상에 전념하기 마련이다.

그런 나를 아랑곳하지 않고 한 점의 붉은 꽃은 만개했다. 허리춤까지 자란 풀과 나무들 사이에서 비집고 자라 꽃을 피웠다. 오랜 시간 땅속에 뿌리를 두고, 보이지도 않는 순을 올리며, 어쩌면 버려진 듯 관심도 없던 존재였는데, 소리 없이 한 치 한 치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한없이 쏟아지는 빗줄기속에서도 너무나 강렬한 붉은색은 그래서 오래 나를 잡아놓는다. 풀숲 사이에서 매끄럽게 뻗은 튼튼한 줄기와 잎, 타오르는 듯 붉디붉은 꽃, 하염없이 내리는 비속에서도 자신감 있게 존재를 과시한다. 이미 꽃을 다 떨군 한 여름, 유독 붉은색을 보여주는 칸나. 커다란 바위를 굴려 해하려 함에 다친 상처에서 흘러내린 피가 떨어진 자리에서 피어난 꽃, 빗속의 칸나는 그렇게 자리하고 있다.

올 초에 가지를 치고 버려지는 부분에서 벽면에 붙은 흡착뿌리를 가진 녀석을 발견하고, 안쓰러워 흙에 꽃은 적이 있다. 담장 밑에 내버려두다시피 한 녀석인데 살려준 감사의 표현인지 어느새 벽을 다 덮고도 남아 꽃을 피웠다.

성은을 입고 담장 넘어 임이 다시 찾아주길 오매불망 기다리다 죽은 자리에서 핀 꽃인데, 아직도 그리워하는 미련을 버리지 못해 또 담장을 넘어 보려나? 오래오래 기다렸기에 담 하나 넘는 수고로움은 아무것도 아닌 듯, 작은 뿌리를 가진 한 치의 가지가 그 넓은 담장을 다 덮고, 대문의 기둥을 오르고 있다. 켜켜이 쌓인 시간을 한순간에 보여주는 장엄함이다.

몇 해 전 화분에서 꽃을 피우고, 구근을 나눠 번식시키고자 땅에 심은 녀석이 있다. 그런데 웬일인지 한 해 두 해가 지나도 꽃을 피우지 않는다. 기나긴 시간 잎을 땅 위로 올리지만 꽃대를 올리지 않는 녀석을 잎이 진 상태에서 땅에서 끌어내었다. 캐었다 가을에 심으면 내년 봄에 꽃을 볼 수 있으려나 해서다.

제법 많은 알뿌리가 나왔다. 널따란 화분에 넣었는데, 흙도 없는 화분에서 꽃이 피었다. 그런데 내가 심었던 녀석이 아니다. 잎과 꽃이 서로 만날 수 없는 상사화가 핀 것이다.

몇 달간 물도 없이 내쳐진 녀석이 피워낸 꽃은 짧은 꽃대였지만 너무나 아름다운 꽃을 양쪽으로 달고 있었다. 켜켜이 싸고 있는 알뿌리의 양분이었던가? 미안하면서도 너무 대견스러운 녀석이다.

놀랍고도 미안하고 감사한 일이다. 어쩌면 함께 하는 시간과 공간에서 서로의 관심과 정성에는 별 상관성을 갖지 않는 것들이 많다. 그러나 함께 있기에 더한 행복을 영위한다. 그래서 더 미안하고 감사할 뿐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