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하루
어떤 하루
  • 최명임<수필가>
  • 승인 2017.08.07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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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최명임

누가 어부에게 물었다. 어떻게 살아오셨느냐고….

“밥 먹고 고기 잡고, 고기 잡고 밥 먹고, 자다가 고기 잡고, 고기 잡다 졸고 성난 파도를 만나면 꼼짝없이 죽나 싶어 무서웠지요. 그러구러 세월이 흘렀어요. 내가 바다인지 바다가 나인지 몰라. 뭍에 올라서면 어지럼증이 생겨.”

평범하고 지루한 일상으로 들린다. 그다지 즐거울 일도 없는 삶 같아서 따분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평온했던 많은 날과 불각시에 만난 성난 파도에도 살아남아 흘러가는 이 일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하루가 축복이다. 살다 보면 어느 하루가 무참하게 희망을 꺾어 버릴 때가 있다. 그래서 평범하게 지난 어제가 눈물겹게 그리울 때가 있다.

얌전히 내리던 비가 돌변하더니 삽시간에 사달을 내었다. 평온한 하루를 도둑맞은 사람들이 집과 재물을 잃었고 어떤 이는 생목숨까지 빼앗기고 말았다.

노여움이었다. 순식간에 휩쓸어버린 분노의 표출 앞에서 아연실색했다. 댐과 천이 범람의 위기에 서자 무지막지한 빗줄기도 저를 다스린 듯 가까스로 멈추었다.

그날 아침 억수 장맛비를 보며 밭에 앉혀 둔 컨테이너 창이 열렸다는 생각을 했다. 창 밑 텔레비전과 어지럽게 얽힌 전기선에 문제가 생길까 봐 불안했다. 남편의 등을 떠밀어 나섰다. 가는 길에 위험한 곳은 없으니 걱정하지 않았다. 오판이었다. 저지대의 굴다리는 이미 물바다가 되어 있었다. 들어서는 순간 차는 반쯤 물에 잠겨버리고 눈앞에서는 사방에서 몰려든 빗물이 폭포수처럼 들이닥치고 있었다. 성난 이리떼처럼 유리창 위로 덮쳐왔다. 후진하자니 물웅덩이요, 전진하려니 밀려드는 물살이 무서웠다. 오금이 저리는데 설상가상으로 시동이 꺼져버렸다. 근처에 공사 하던 수자원 관리지역이 혹 탈이 나서 비와 함께 몰아치는 것은 아닐까 싶어 더 무서웠다. 남편도 놀라고 당황했다. 급히 시동을 걸고 강하게 액셀레이터를 밟았다. 억지로 쿨렁 한 바퀴 앞으로 나가는 것 같더니 시동이 꺼져버렸다. 그러기를 몇 차례 하고 나서야 간신히 벗어났다. 안전지대에 올라 떨리는 마음을 가라앉히니 차도 먹은 물을 게워내며 제 기능을 찾았다.

밭으로 들어가는 진입로가 사람 키만큼 패이고 둑이 사방으로 무너져 처참했다.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놀란 탓인지 비 탓인지 오한이 들었다. 넋을 잃은 수재민들 곁에 이웃이 모여들었다. 수마가 할퀴고 간 상처를 어루만지며 비 같은 땀을 흘리고 있다. 나도 십시일반 그 행렬에 동참하며 생각했다. 이기적인 현대인의 자화상을 보며 삭막하다 말하지만 우리의 가슴 안에는 늘 사랑이 태동하고 있는 거라고.

위협적이고 채찍 같은 장맛비는 때때로 찾아오는 우리 인생의 악몽 같은 존재이다. 잠시 넘어지겠지만 꺾이지 않는 갈대처럼 다시 일어나 삶의 참맛을 배운다.

수재민들이 하루빨리 생업으로 돌아가 평범하나 소중한 하루, 그 축복을 한껏 누렸으면 한다. 시간이 흘러 누가 물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하루 그저 평범하기 짝이 없는 오늘을 잘살고 있다고 웃으며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불가항력 앞에서 절망스럽더라도 힘을 내어 다시 열정의 도보를 시작하길 빈다. 오늘 아픈 하루는 내일에 묻혀 흘러가 버릴 시간이므로?. 그리고 우리는 살아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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