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거슬러 올라
시간을 거슬러 올라
  • 김희숙<수필가·원봉초병설유치원교사>
  • 승인 2017.08.03 20:0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生의 한가운데
▲ 김희숙

“희숙아~ 우리 딸 결혼해.” 제천에서 전화가 왔다. 성연이가 결혼을 한다는 소식에, 벌써 라는 말과 유수와 같다는 말이 떠오르며 지난 세월을 돌아보게 했다. 은순 언니에게 딸의 결혼을 축하한다는 말을 건네며, 나도 우리 아이들의 결혼을 상상해 보았다. 아직은 먼일이라고 생각해 왔었는데, 그리 먼일은 아니었다. 제천을 떠올렸다. 문득 스치는 얼굴이 있었다. 오랜만에 제천에 가서 추억에 잠기다 와야겠다는 생각에 두근거렸다.

결혼 일주일을 앞두고 전화가 왔다. 결혼식 축시 낭송을 해 달라고. 난 한 번도, 정말이지 단 한 번도 결혼식 축시를 낭송할 거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순간 나는 당황했고, 조심스럽게 거절을 했다. 결혼식 축시나 축사는 인생을 삐까번쩍하게 산 사람이 해야 할 듯했다. 되돌아 보건대 난 그 정도로 인생을 잘 산 것 같지는 않았다. 뒤죽박죽 살아온 날들을 되돌아보며 안 될 일이라고 다짐했다. 그러나 언니가 몇 번 부탁을 하여 별도리가 없었다. 밤새 인터넷을 뒤졌다. 결혼식 축시에 적합한 시를 골랐다. 그리고 그에 걸 맞는 음악을 찾았다. 다음날부터 연습을 시작했다. 안 하면 안 했지 한다고 한 바에야 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낭독이 아닌 낭송을 해주고 싶었다. 휴대전화기에 시를 녹음해서 설거지할 때도 운전을 할 때도 세수하면서도 그리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도 계속 들었다. 그리고 틈만 나면 정신 나간 여자처럼 웅얼거리며 다녔다.

드디어 일요일이 왔다. 오후 3시 예식이지만, 먼 길이고 또 결혼식장에 가서 리허설도 해 봐야 하기에 12시에 출발을 했다. 제천 가는 길, 만삭이 된 여름 산이 한껏 부푼 초록 배를 내밀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산을 스치며 지난 시간도 스쳤다. 그림을 그렸던 J가 부푼 산속에서 나무 그림자 사이로 살며시 얼굴을 내밀었다. 문인협회 출판 기념회에서 J를 처음 만났었다. 동인지 표지 그림을 보여주며 내 수필을 보고 영감을 얻어 그렸다고 수줍게 책을 내밀었었다. 그래서 그림 제목도 내 수필의 한 구절인 “마음을 텅 비우고 싶을 때”라고.

함께 영화를 봤던 일, 솟대 마을에 가서 가족의 평온과 안녕을 빌던 일, 산 아래'라는 음식점에서 삼겹살을 먹던 일, 깊은 산 속에 안겨 있던 `빈자의 노래'라는 음식점에 가서 계곡에 발을 담그고 백숙이 익어 가길 기다렸던 일, 레스토랑에서 빅토르 위고의 작품에 대해 설전을 벌였던 일, 뮤지컬 캣츠를 봤던 일. 수많은 날이 머릿속 가득 펼쳐져 아득하게 맴을 돌았다. 그리고 어느 날 훌쩍 그림 공부를 한다며 독일로 떠나 가 버렸던 J. 지금은 연락이 끊겨 멀어져 버린 J. 그녀 생각에 시간을 거꾸로 더듬다 보니 어느덧 제천에 도착했다.

예식장에 도착해 준비해 간 엘가의 사랑의 인사를 배경 음악으로 깔고 시를 낭송해 보았다. 그리고 준비해 간 드레스로 갈아입고 기다렸다. 식이 진행되는 동안 그들의 행복을 기원했다. 성연이가 울었다. 성연이의 눈물을 보는 순간 나도 울컥해서 눈시울이 젖었다. 식이 끝나고 홀로 의림지를 걸었다. 예전 그대로였다. 변한 건 나를 둘러싼 시간 들 뿐이었다. 의림지에 서자 그 시절이 또 떠올랐다. 함께 도란도란 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던 일, 길 카페에서 엉성한 마술을 보여주었던 J. 세월 속에 묻어 두었던 그 아슴한 기억들이 노을 속에 붉게 가슴을 적셨다. 다시 그녀를 볼 수 있다면 그 시절 참 고마웠다고 말하고 싶다. 숱한 방황의 시간 속에 함께 서성이며 영혼을 나누어 줘서.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