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향교 앞 선정비에 얽힌 옹몽진 현감 이야기
음성향교 앞 선정비에 얽힌 옹몽진 현감 이야기
  • 김명철<청주 서경중 교감>
  • 승인 2017.07.19 19:2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충북역사기행
▲ 김명철

음성읍 내에서 충주로 가는 구불구불한 옛길의 산허리를 감싸고 올라가는 고갯길 마루에 음성 시내를 굽어보는 자리에 음성향교가 자리하고 있다. 음성향교 앞 도로변에 군인들이 도열한 듯 비석들이 줄지어 서 있다. 이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대표적인 선정비(유애비)가 초대 음성 현감을 지내신 옹몽진 현감의 것이다. 1982년에 출간한 `내고장 전통 가꾸기' 음성군 편에 소개된 내용이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

옹몽진은 조선 명종 때 사람인데 어려서부터 착하고 부지런하였다. 어느 날 향교 앞을 지나다가 글을 읽는 소리에 결심하게 된다. 향교에 들어가서 낮에는 향교에 딸린 논밭 일을 하고 밤에는 열심히 공부를 하였다. 그 후 향시에 급제하고 이어 복시에도 합격한 뒤 문과에도 급제한 옹몽진은 향교의 고직일을 맡아 보면서 관직이 제수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몇 해가 지나도록 소식이 없었다. 기다리다 못해 다시 중과시를 보았는데 또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나 관직은 제수되지 않았다.

하루는 고직녀와 밭을 갈고 있는데, 보은으로 부임하는 신임 사또의 행차가 지나치게 요란하여 고직녀를 불러서는, “가서 신임 사또한테 신임 하례를 들이게 하라.” 하였다. 고직녀가 그 뜻을 전하니 신임 사또가, “나는 중시에 급제한 사람이니 그럴 수 없다고 일러라.” 한다. 옹몽진은 그 말에, “나는 중증시에 급제하였으니 어서 신례를 들이도록 일러라” 하였다. 그 말이 사또에게 다시 전해지자, “나도 중증시에 급제했으니 그럴 수 없다고 여쭈어라.”한다. 일이 이쯤 되니 옹몽진은 좀 더 화가 나서, “허, 중증시로 말할 것 같으면 내가 먼저이니 어서 신례를 드리라 일러라” 하였다. 이 말에 신임 사또는 깜짝 놀라서 멍석과 차일을 펴게 하고 옹몽진을 상석에 모신 뒤 엎드려 절하였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세상 이야기와 시와 학문을 논하다가 신임 사또가 떠날 시간이 되었다. 옹몽진은 신임 사또의 신임 하례를 받은 답례를 조금 전에 밭을 갈던 황소를 아낌없이 선사하였다.

그 후 두 해 뒤 그때의 보은군수는 내직으로 들어가 승정원 승지 일을 맡아 보게 되었다. 어느 날, 임금이 승정원에 납시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외직에 있던 일을 하문 받자 옛 보은군수는 문득 옹몽진과의 일이 생각나, 옹몽진의 인물됨과 박학다재한 학문을 칭찬하며 그의 불우한 처지를 자세하게 이야기하니, 임금은 옹몽진을 상경하도록 명을 내렸다.

옹몽진이 임금 앞에 부복하고 배알하니, 임금이 소원을 물었다. 그때 옹몽진은 “소인은 평생 음성향교의 고직이오니 그리 하렴하여 주사이다.” 하니, 주위에 있던 신하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임금은 옹몽진의 순박하고 꾸밈없는 마음씀과 재질을 귀중하게 생각하여 음성 현감을 제수하였다. 그리고 옹몽진에게 만은 임기를 적용하지 말고 죽을 때까지 현감을 하도록 특명을 내렸다. 그러고는 당시에는 음성에 고을이 설치되지 않았을 때여서, 충주목에 명하여 동면과 서면·남면을 떼어 음성현을 설치토록 하고 초대 현감으로 옹몽진을 앉혔다.

옹몽진 현감은 무엇보다 무거운 세금을 줄이고 백성의 뜻에 따라 시책을 하나씩 시행해 나가니 백성들이 안심하고 부지런히 생업에 힘써 곡식이 창고에 쌓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농민은 격양가를 부르고 글방에서는 글 소리가 높으니 군민 중에 옹현감을 따르지 않는 자가 없고, 옹현감을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마침내 옹현감이 나이 들어 죽자, 그 덕을 기리기 위하여 군민의 이름으로 유애비를 세웠다고 한다.

공부의 목적이 개인의 입신양명이 아니라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라는 의미를 선정비 비석들 앞에서 되새겨 본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