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게질
비게질
  • 최명임<수필가>
  • 승인 2017.07.17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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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최명임

누렁이는 늘 혼자였다. 벽에는 비게질한 흔적이 들러붙어 있었는데 고독을 향한 저항이거나 운명에 대한 반항이었는지도 모른다.

사람에게는 비빌 언덕이 되었지만, 자신은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을 벽에다 대고 비게질을 했다.

봄이 오면 정체된 기운을 가르고 누렁이와 뒷산으로 나섰다. 그럴 때면 나도 누렁이도 봄바람 든 처녀처럼 발걸음이 통통 튀었다. 봄에 취하는 것은 사람만이 아닌 듯 누렁이는 연한 풀의 촉감과 봄 향기에 취해 함지박 같은 눈을 껌뻑거린다. 산만한 시선을 재촉해 산마루에 이르면 고삐를 풀어준다. 신선한 바람 앞에 선 누렁이의 몸에서 고독의 피각들이 뚝뚝 떨어진다.

만족하게 배를 채우고 나면 심오한 반추에 든다. 우공牛公의 좌선이다. 이 순간을 방해하는 쇠파리 떼는 정말 비각이다. 잡념처럼 끈질기게 들러붙는다.

누렁이는 머리를 흔들며 진저리를 치지만, 쇠파리 떼는 주둥이를 박고 지독하게 비게질을 해댄다. 슬그머니 일어나 등을 갈참나무에 대고 비게질을 한다. 시선 밖에 있는 등과 쇠파리 떼는 삶의 사각지대였고 갈참나무는 해법이었다.

비게질하는 누렁이가 불쌍하다는 생각을 했을 때 내 나이 열 살쯤 되었을 때이다. 팔이 없어 꼬리로 꼬리로도 할 수 없는 일은 비게질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감당 못할 권태에 빠졌을 때 나무가 걷는 상상을 한 적이 있다. 정체된 자리에서 벗어나 날고 싶은 꿈을 꿀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큰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를 보니 저 또한 부빔질이다. 난바다를 누비다 귀향한 바람을 빌어 나무가 날고 있다. 바람의 자유를 소망하는 것일까.

신은 사람을 빚으실 때도 부빔질의 원칙을 세우셨나 보다. 혼자서는 살 수 없도록 허점 수두룩하게 넣고 망각도 덤으로 넣고 부빔질하며 살라 지으셨나 보다. 소망지수가 극에 달하면 우리는 하늘에 기대어 애달피 부빔질을 한다. 지상에서 가장 발칙한 동물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하늘은 마다않고 품어 안으신다.

부빔질은 소망지수가 높을 때 나 아닌 누군가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부모와 자식이, 지아비와 지어미가, 나와 이웃이 서로 비비적거리며 살라 해놓고 하늘은 당신의 가슴 한쪽과 지혜를 채워 현자賢者를 보내주셨다.

저마다 가려운 곳을 긁어 줄 누군가를 찾아 나서는 것이 삶이다. 알고 보면 인생은 적나라한 부빔질의 연속이다. 자동차의 후방거울처럼 누렁소의 비게질처럼 해답은 있게 마련이다.

우리 집 누렁이는 가려울 때 비게질을 했다. 고독할 때도 그랬을 게다. 나무는 자유가 그리울 때, 사람은 자신의 존재를 못 견디게 확인하고 싶을 때 부빔질을 한다. 이런 생각에 빠질 때면 편견으로 매겨놓은 고등과 하등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자연과 나는, 그대와 나는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는 하나라고 하지 않았는가.

건조한 가슴을 들이밀면 부빔질할 어깨를 내어 주는 그대가 있어 행복하고, 손잡아주는 자연이 있어 즐겁고, 궁극에는 귀향할 하늘과 땅이 있으니 살만한 인생이다.

만약에 태초의 암흑이 다시 찾아온다면 창조주는 급히 “세상아, 생겨나라!”라고 하실 것이다. 창조주 역시 우주 만물 안에 존재할 때 가장 행복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창조주의 신성한 섭리는 현재 진행형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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