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책장을 넘기며
추억의 책장을 넘기며
  • 권진원<진천 광혜원성당 주임신부>
  • 승인 2017.07.13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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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자의 목소리
▲ 권진원

주변의 모습을 바꿈으로 해서 새로운 마음가짐과 기분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책상과 가구의 배치를 새로하거나 물건들의 위치를 변경, 정리하면서 기분전환의 시간을 가지기도 합니다. 저도 며칠 전 장마로 인해 비가 계속 내리던 차에 다운된 마음에 생기를 불어넣을 요량으로 책꽂이의 책들을 정리했습니다. 빛바래고 손때를 탄 오래된 책들 사이에서 추억이 서린 노트 한 권을 발견하였습니다.

20여 년 전 가톨릭 사제가 되기 위해 신학대학을 입학하여 가톨릭대학교 신학과 1학년 때 쓴 성경 묵상 노트였습니다.

거의 15년 만에 펼쳐본 노트의 글들은 저에게는 정말 뜻밖의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처음에는 유치찬란한 글들을 보면서 부끄러움에 얼굴 낯빛이 불어졌습니다. 때론 소리내어 웃어볼 만한 재미난 표현들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노트를 읽어 내려가며 `내가 저런 때가 있었구나? 참 저 시절에는 착하고 순수했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편으론 어리게 보이기도 하도 또 어떤 면에서 맑고 깨끗하다고 생각되기도 하고 지금의 저와 비교를 하니 여러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성경 구절 하나에도 저리도 큰 감동을 느끼고 그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을 하였는지 현재의 저와는 다른 사람인 듯 느껴지기까지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느님을 위해 내 모든 것을 바칠 수 있을까 이웃과 사람들을 사랑하는데 늘 모자라다 느끼고 어찌하면 십자가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순수청년을 볼 수 있었습니다.

지금의 저를 보면 신자 수를 늘리는 일, 성당의 건축과 주변 환경을 깨끗이 하고 정리하는 일, 어떻게 하면 봉헌금을 늘리고, 사람들에게 나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을지 등등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는 듯 해보입니다.

순수하게 말씀을 전하는 일, 고통받고 어려운 이웃을 돌보고 위로하며 공감하는 일, 병자를 방문하여 기도하는 일 등등에는 어쩌면 우선권이 밀려 있는 것 같습니다.

20년 전 저의 노트를 읽었을 때의 그 순수청년은 분명히 후자의 일에 더 몰두하고 노력했을법한데 20년 후의 그를 보면 과거의 청년은 온데간데없고 앞머리는 빠지고 흰머리가 늘어가는 고집쟁이 중년 한 명이 되어버렸습니다.

세월이라는 풍파에 치이고 모가 나서 저렇다고 말한다면 어지간히 낯짝 또한 두꺼워진 것이 아닌가 반성하게 됩니다.

마음 한 켠 저 깊숙이 숨겨둔 과거의 저를 조심스럽게 꺼내 보려 합니다. 지금의 내가 순수청년을 보며 유치하다 말해도 그 청년은 다름 아닌 저이기에 왜 이리 마음이 변했느냐고 물으면 변하지 않고 숨겨두었을 뿐이라고 헛웃음 치며 반갑게 맞이하고자 합니다.

성경을 읽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지고 있다고 자신하며 어떤 일과 난관에도 그 열정과 기세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 말하던 젊은 청년을 불러보려 합니다.

이제 숨어 있지도 부끄러워하지도 말고 당당한 저로서 그 순수청년의 마음을 되돌려 살아보려 합니다. 우리에겐 언제나 추억으로만 떠올리는 젊은 날의 순수청년이 아직도 우리 안에 여전히 숨 쉬고 살아가고 있음을 기억하며 그때 그 시절로 되돌아가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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