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시계
오래된 시계
  • 정세근<충북대 철학과 교수>
  • 승인 2017.07.05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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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근 교수의 인문학으로 세상 읽기
▲ 정세근

결혼식에 온 친구가 나에게 손목시계를 벗어 주었다. 30년 전 이야기다. 뭔가를 나에게 주고 싶었지만 줄 수 없었던 벗의 소중한 선물이었다.

그때 `아버님 손목시계야'라고 말했던 것 같다. 내 기억 속에 그 시계는 친구의 것이자 그의 아버님의 것으로 각인되었으니 말이다. 친구 아버님은 시계방도 하셨으니 비싼 시계는 아니더라도 나름 좋은 시계를 차고 다니셨을 게다. 그렇다고 해서 이름 있는 것은 아니었다. 태엽을 매일 감아줘야 하는 옛날 시계였다. 아울러 시곗줄의 고동(古銅)색은 시계를 골동(骨董)으로 더욱 빛나게 해주고 있었다.

그 친구는 부모님을 모시기 위해 학업조차 포기한 순정파였다. 글도 잘 썼고 노래도 잘 불렀다. 시상(詩想)은 발랄했고 미성(美聲)은 탁월했다. 여고생이라면 한 번쯤 사귀어보고 싶을 정도의 문재 넘치는 문학청년이었고 바이브레이션이 깊은 테너였다. 참, 운동도 잘했다. 그의 농구실력은 남학생들의 선망이었다. 몸을 휘돌려 공을 빼는 그의 동작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세파에 시달리며 오늘까지 달려온 그는 이제 늙수그레한 털보가 되어 내 앞에 서면 반갑다고 옹이진 손을 내놓는다. 그 모습이 나에게는 여전히 악성 파파로티로 보이고 농구선수 허재로 보인다.

상가에서나 보다가 그 친구가 나온다는 약속자리가 하나 잡혔다. 상을 당한 친구가 끝까지 자리를 지켜준 몇몇 벗들을 위해 따로 만든 저녁이었다.

그날 내 앞에 놓인 지 이미 30년 된 그가 준 시계를 보며 생각했다. 과연 이 시계는 누구와 함께 있어야 하는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많았다.

첫째, 받은 선물을 돌려준다는 것은 자칫하면 실례가 될 수 있다.

둘째, 선물을 받은 지 30년이면 이미 충분히 그 가치를 누렸기에 돌려주어도 된다.

셋째, 이 물건이 정말 필요한 사람이 누구일까?

넷째, 선물 받아 30년, 돌려주어 다시 30년이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것 아닌가?

다섯째, 추억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이 시계가 있어야 골동품으로서의 가치가 올라간다.

여섯째, 벗에게 뭔가 주고 싶다.

일곱째, 삶은 변화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가진 것을 버리고 받은 것을 돌려주는.

여덟째, 나도 살면 얼마나 산다고.

아홉째, 물건 간수도 못하면서 소중한 이것을 지킬 수 있을까?

열째,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로 돌리라.

마지막 문장은 요즘 내게 많이 떠오르는 마태 22장 21절 예수의 말씀이다. `시저의 것은 시저에게로'(Render unto Caesar the things which are Caesar`s.) 세상에는 내 것이 아닌 그들의 몫이 있다는 것이다.

그날 `이거 아버님 것 아니냐?'라며 시계를 주었더니 놀란다. 말로는 `네 걸 왜 내가 갖냐?'면서도 감회가 깊은 모양이다. 갑자기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숙이는 그를 보며 좌중이 모두 찡했다. 내게서 툭 튀어나온 말이 이랬다.

“나에게는 물건이지만, 너에게는 물건 이상이잖아.”

어찌 나에게도 물건만이랴. 세월이 물건이더냐. 그러나 나에게는 `선물'이지만 그에게는 `유품'아니더냐.

/충북대학교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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